

[권경률기자] SBS 드라마 '대물'이 떴다. '대한민국 최초 여자대통령'을 소재로 한 정치드라마가 방영 한 달도 못돼 시청률 30%에 육박하더니 정가의 화제로 떠오른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구설수도 만만찮다. 드라마가 탄력을 받을 찰나 의견차이로 충돌을 빚은 작가와 연출이 교체되었고 정치 외압이 있었네, 특정 인물을 빗댔네, 입방아도 드세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장르다. 그 판타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바람과 욕구를 끄집어 낼 때 폭발성을 띈다. 정치드라마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기본적으로 판타지다. 그래서 인기 정치드라마를 보면 정치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취향이 드러난다. 한국의 '대물', 미국의 '웨스트 윙', 일본의 '체인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세 나라 국민들은 드라마를 보며 어떤 정치를 꿈꿀까?
미국 '웨스트 윙'…정의롭고 책임감 강한 엘리트 정치
'웨스트 윙(The West Wing)'은 미국 NBC에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드라마다. 방송기간 중 4년 연속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재미와 작품성을 두루 갖췄다는 평이다. 이 드라마는 미국정부의 가려진 뒷모습과 백악관 참모진들의 고군분투를 시청자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게 그려냈다. 그래서 혹자는 정치드라마의 교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괜히 언급한 게 아니라는 말.
웨스트 윙은 백악관 내에서 대통령의 참모진들이 일하는 곳이다. 극중 대통령 죠수아 바틀렛(마틴 쉰)에겐 능력 있고 개성 넘치는 참모들이 있다. 대통령의 친구이자 오른 팔인 비서실장 리오 맥게리, 할리우드 PR회사 출신인 대변인 CJ 크렉, 똑똑하지만 욱하는 성격인 비서실 차장 조쉬 라이먼,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지닌 공보담당 부장 토비 지글러, 그리고 바람둥이 공보담당 차장 샘 시본 등이 그들이다.
가상의 미국 대통령 죠수아 바틀렛은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교수 출신으로 뉴햄프셔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직에 오른다. 그는 국정에 임할 때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골이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가장이기도 하다. 특히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온 쿠바 난민들을 외교가 아닌 인권의 잣대로 처리하는 대목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정의롭고 책임감이 강한 엘리트 정치, 이것이 미국인이 꿈꾸는 정치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다. 그의 참모들도 열정적이긴 매한가지. 총기규제, 테러리즘, 핵잠수함의 실종 등 골치 아픈 현안들을 서로 의지하며 맹렬하게 풀어나간다. 참모들의 활동 중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대통령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의회 및 정적들과 끈질기게 대화하고 타협한다는 것. 대법관 임명 에피소드에서 야당 지지 판사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낙태전력을 가진 여성 대법원장을 얻는 과정이 그렇다.
일본 '체인지'…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한다는 것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드라마는 지난 2008년 후지TV에서 방영된 '체인지'다. 이 드라마는 평균 22.1%의 시청률을 올렸는데 이는 그 해 일본 드라마 중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인기 요인이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인 아사쿠라 케이타(기무라 타쿠야)가 돋보였다. 엘리트인 죠수아 바틀렛과 달리 아사쿠라는 어딘가 소시민 냄새가 났다. 소심하면서도 근성 있는 최연소 총리대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
아사쿠라 케이타는 본래 천체관측을 좋아하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정치가인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도쿄에서 온 미야마 리카(후카츠 에리)가 집요하게 설득하자 떠밀리듯 부친의 지역구에 출마한다. 선거과정에서 그는 기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행보를 시작한다. 아버지의 뇌물수수 의혹이 불거지자 겸허히 인정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한 것이다. 결과는 근소한 차이의 역전승. 그는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극중 아사쿠라 케이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정치가가 됐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총리대신 선거에 나선 아사쿠라는 그들만의 정책용어가 난무하는 TV토론을 비판하며 카메라 너머의 국민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선거유세장에서는 한 손을 펼쳐들며 “제 손도 여러분과 똑같은 손”이라고 외친다.
마침내 총리에 당선된 아사쿠라. 그러나 현실정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노련한 정치꾼들에게 젊고 잘 생긴 ‘초짜’ 총리는 그저 갖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참모진, 총리실 직원들, 시민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정치현실은 바뀔 기미가 안 보인다. 아사쿠라는 역부족을 절감한다. 결국 그의 선택은 의회 해산이었다. 이것은 일본국민이 정치에 대해 느끼는 오랜 좌절감이기도 하다.
한국 '대물'…모기 대신 은어 떼가 득실대는 정치
한국 드라마 '대물'은 굳이 비교하자면 '웨스트 윙'보다는 '체인지'에 가깝다. 아직 초반부이긴 하지만 정의롭고 책임감이 강한 엘리트 정치도, 대화와 타협으로 현안을 풀어나가는 노련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평범한 엄마가 모기떼에 시달리는 간척지 주민들을 위해 선거에 나서 좌충우돌 하는 이야기가 주조를 이룬다. 주인공 서혜림(고현정)은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정치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돈도 조직도 없이 '클린선거'를 치르며 서혜림은 흑색선전, 허위공약 등 한국정치의 온갖 추잡한 단면들을 온몸으로 겪는다. 밀실거래, 불법자금과 같은 구시대의 망령이 선거판을 주무르며 권력욕을 드러내는 한국의 정치현실. 그 한가운데서 그녀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성찰하며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탐색한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간척지 모기떼를 몰아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모기떼를 없애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는 것일까?"
그녀의 선거전은 이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간척지 모기떼를 쫓는 것은 물론 저 강에 고등어만한 은어들이 돌아오게 하자! 대안은 친환경 개발이다.” 남편의 목숨값을 도박판에 날리면서도, 조작된 기사로 계란세례를 받으면서도, 서혜림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한 걸음씩 묵묵히 나아간다. 어느새 그녀에겐 강태산(차인표)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정치인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보궐선거는 극적인 뒤집기로 끝이 난다.
'대물'은 ‘정치인 서혜림’의 고난극복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양념처럼 한국정치의 부조리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고 냉소하면서도 국민 편에 설 지도자를 열망하는 한국인의 이중심리를 겨냥한 것이다. 미리 짜놓은 드라마의 얼개를 보면 서혜림은 향후 도지사를 거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냉혹한 정글을 헤치며 과연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판타지를 제공할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미·일의 대표 정치드라마는 각기 자국민이 품고 있는 정치에 대한 바람과 욕구를 자극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그 판타지는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겠지만 공통의 메시지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국민의 편에서, 국민의 눈높이로, 국민의 한 사람이 되어 정치를 하라는 것. 이처럼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정치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민주사회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사진=각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