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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스토리] 은수미 의원 "서울대 사회학과 진학 후회한 이유는…" Only

은수미 의원은 유명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깽의 자살론을 읽은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 이새롬 기자
은수미 의원은 유명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깽의 '자살론'을 읽은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 이새롬 기자

[소미연 기자] 민주통합당 은수미 의원은 감성이 풍부한 학생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고, 발레 '지젤' 공연은 극의 전개를 외울 만큼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관람했다. 물론 은 의원이 학창시절 예술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집이 제법 잘 살았던 덕분이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서 해병대 장교로 예편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그 시절 군인 집안이면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집"이었다.

평탄할 것만 같던 인생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유명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깽의 '자살론'을 읽고서 사회학과 진학을 결심했다. 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자살론'과 달리 뒤르깽의 '자살론'은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뒤르깽의 '자살론'이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가 왜 자살률 1위인가, 한국의 30대 남성 사망률 1위가 왜 자살인가, 더 나아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왜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가, 이런 사회학적인 질문을 던지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뒤르깽처럼 질문을 하면 해결책이 보일 것 같았어요."

호기심 많은 유년 시절 -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대학생이나 어른들이 읽는 책들을 거의 읽을 만큼 책을 좋아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호기심 많은 유년 시절 -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대학생이나 어른들이 읽는 책들을 거의 읽을 만큼 책을 좋아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뒤르깽의 '자살론'은 은 의원이 어린 시절에 품었던 '물음표'를 다시 끄집어냈다. 은 의원이 어린 시절부터 20년 동안 살았던 서울 신림동은 당시만 해도 중산층과 천막촌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판잣집에서, 흙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은 의원은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자신이 먹고, 다른 하나는 친구에게 주고 싶어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의문이 생겼다. 친구의 잘못이 아닌데 우리는 왜 다른가, 이 해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가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 군부독재로 대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던 '시끄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모 대학에선 대학원을 포함한 6년치 장학금과 생활비를 제공하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하자 반대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화여대 영문과 다니는 딸을 보는 게 꿈"이었지만 은 의원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모범생 고등학생 시절 - 아버지는 이대 영문과 진학을 바랐지만 은 의원(왼쪽)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모범생' 고등학생 시절 - 아버지는 이대 영문과 진학을 바랐지만 은 의원(왼쪽)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학한 서울대 사회학과는 은 의원의 기대와 달랐다. 1학년 첫 학기 내내 미국 유학을 생각할 정도였다. 캠퍼스 내 잔디밭을 점령한 사복경찰은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았고, 실제 강간 사건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대학 문화 자체도 매우 딱딱했다. 일부 사회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스커트에 부츠를 신은 은 의원을 보고 "왜 사회대에 와서 물 버리냐"고 손가락질 했다. 충격을 받은 은 의원은 다음날부터 치마를 입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무서워서 시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는 제가 지식인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식인으로서 제 양심을 팔면서 학교를 다니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돌파구로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그러다 한 학생의 죽음을 목격하게 됐죠. 시위 도중 도서관 6층에서 떨어졌는데, 전경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최루탄을 쏘더군요. 저는 너무 겁이 나서 지칠 때까지 달려서 도망갔어요. 가장 치욕스러웠던 기억이죠. 정말 창피해서 한참 울었어요. 이후 '내 영혼에 검은 상장을 달고 살겠다, 내 영혼에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두려움 떨쳐낸 대학 시절 - 미국 유학을 고민하던 은 의원(맨 오른쪽)은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뒤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두려움 떨쳐낸 대학 시절 - 미국 유학을 고민하던 은 의원(맨 오른쪽)은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뒤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다. / 은수미 의원 제공

하지만 학생운동의 끝은 제적이었다. 이후 은 의원은 봉제공장 '공순이'로 살았다. 노동운동도 쉽진 않았다. 백태웅·조국 교수, 박노해 시인과 함께 남한사회주의자노동자연맹(사노맹)을 결성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돼 6년을 복역했다. 은 의원은 이 기간 동안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목의 종양을 제거했고, 결핵균이 퍼진 장을 50cm 잘라냈다.

"운이 좋았어요. 큰 수술을 받고도 살았으니까요. 감옥에 있으면서 책도 많이 읽었죠. 당시 어머니가 한양대 앞 사회과학 서점과 계약을 하고 시나 소설, 사회과학 등 신간 서적을 많이 보내주셨어요. 출감해서 다시 노동사회학을 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만류하셨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영혼에 검은 상장을 달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 아직까지 제가 도망쳐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많았지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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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14 11:56 입력 : 2013.03.14 11:5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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