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철의 책 <삶을 축제로>에서는 한 무명 마라토너가 진심 어린 땀방울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모습을 소개한다. 그는 "뛰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 힘든 일 이었다"고 말한다. 뛰지 않으면 육체적으로 편해질 수 있어도 마음과 생각은 불편해 진다는 것. '오늘 한번쯤 죽어 보자,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쯤이야…'라고 마음의 저울질을 했단다. 포기와 게으름 대신 인내와 끈기를 선택한 것이다.
세계의 높은 벽을 넘기 위해 부지런히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한국 육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한 17명의 선수 가운데 결선에 오른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역대 올림픽에서도 1984년 LA올림픽 김종일(멀리뛰기), 1988년 서울올림픽 김희선(높이뛰기),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진택(높이뛰기) 등 3명 뿐이었다.
그러나 42.195km를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이며 달리는 '올림픽의 꽃' 마라톤은 달랐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4년 뒤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이봉주가 은메달을 땄다. 특히 황영조의 금메달은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이 따 낸 금빛 메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기도 했다. 1936년 일제 강점기에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건 고 손기정의 한을 56년 만에 푼 순간이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세계 정상급 나라들과 겨루며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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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몬주익의 영웅' |
16일 오후 2시. 서울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올림픽 기념관 근처 한 카페에서 황영조를 만났다. 먼발치에 보이는 오륜기가 이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코리언 레전드' 일곱 번째 주인공인 황영조에게 올림픽은 자신을 대변하는 또 다른 표상이다. "코리언 레전드로 뽑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오는 길에 휴대전화가 고장이 나서 연락이 안 될까 봐 걱정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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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영조는 한국 마라톤의 전설이 돼 코리언 레전드로 돌아왔다 |
◆ 해녀 출신 母, 황영조 임신하고도 물속에 '첨벙'
서글서글한 강원도 사투리로 기자를 반겨 준 황영조는 1970년 3월 22일 강원도 삼척 출생이다.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힘도 세고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 농사를 짓는 부모의 일을 성실하게 도와 효자로 소문났다. "또래 중에서도 월등히 힘이 좋았어요. 약한 친구들 괴롭히는 사람들을 혼내주곤 했죠.(웃음) 그 시절에는 먹고살기 어려웠기에 어머니께서도 학업보다는 집안일을 도우라며 일을 시키셨는데 특별히 속 썩이지 않고 성실하게 했죠."
황영조의 어머니는 해녀였다. 선천적인 폐활량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짐작했다. "저를 임신하셨을 때도 바다에 들어가셨다고 해요. 출산하는 날에도 미역을 따다가 배가 아프셨다고…. 제가 수상 스포츠를 좋아하거든요. 지금도 시간 날 때 마다 뚝섬유원지에서 동호회 원들끼리 제트스키 등을 타고 있는데 그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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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중인 황영조 국가대표팀 및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 |
학창 시절 집과 학교 사이의 왕복 거리인 10km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체력장을 열 때면 달리기는 물론이고 각 부문에서 월등히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였단다. 삼척 근덕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유도부, 육상부, 수영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사이클부였다. "주변에서 '쟤, 뭐하는 놈이냐'고 하면서 놀라셨죠. 힘도 좋고 운동을 잘하니까요. 처음에는 부모님 몰래 사이클부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나서 반대를 하셨죠."
황영조는 도로 사이클 선수로 뛰면서 곧잘 성적을 냈다. 그러나 강릉 명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육상의 길로 접어든다. 뛰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폐활량이 좋아 중장거리 선수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500m로 시작해 5000m와 1만m로 거리를 늘렸다. 그리고 1989년 3월 제19회 경호역전경주대회에서 3개의 구간 신기록을 세웠다. 이어 같은 해 9월 제7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5000m와 1만m 2관왕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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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앳된 황영조의 모습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
◆ '페이스메이커 하다가…' 마라톤과 이색적인 만남
황영조는 199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코오롱에 입단했다. 그러다가 1991년 마라톤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1990년 제71회 전국체육대회 5000m와 1만m에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다. "그해 3월 국제마라톤이 있었는데 코칭스태프가 동료들을 위해서 페이스메이커로 20km 정도 뛰어 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30km까지 갔는데도 전혀 힘이 들지 않더라고요."
황영조는 이전까지 마라톤 완주 경험은 물론이고 30km 이상을 뛴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 2시간12분35초를 기록하며 3위로 골인했다. 당시 한국 최고기록(2시간11분34초)에 1분1초 뒤진 놀라운 기록이었다.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저도 놀라웠어요(웃음)"
이렇게 황영조의 마라톤 신화는 시작됐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고통을 감수하면서 마라톤 정복의 꿈을 품었다. 그리고 1991년 7월 영국 셰필드에서 벌어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라톤 전향 이후 나선 첫 국제대회에서 단숨에 세계 정상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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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발한 황영조를 기억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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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영조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다, 진정한 노력형 선수였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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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영조는 마라톤 곧 운명이요, 길이 됐다 |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 빼놓고 메달리스트 기념사진?
황영조는 그해 일본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한다. 그리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구간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겨울에 들어서 혹독하게 자신과 싸움을 이어간다. 이는 곧 1992년 2월, 값진 결과물로 이어졌다. 당시 '넘사벽'이라 불리던 한국 마라톤의 2시간 10분 벽을 깬 것이다. 제41회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47초를 기록했다. 당시 한국 최고기록은 2시간11분2초였다.
"분명 운이 아니었음을 제 자신이 느낄 수 있었어요. 제 몸 상태에 대한 확신도 있었죠. 당시 세계 최고기록이 에티오피아의 벨라이네 딘사모 가 갖고 있는 2시간6분50초였어요. A급 기록까지 다가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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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영조(왼쪽)는 고 손기정 선배의 한을 56년 만에 풀어준 영웅이다 |
황영조는 56년 전 손기정 선배의 한이 묻힌 올림픽 무대를 바라보게 됐다. '결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생애 최고의 무대에 설 순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1992년 7월 25일,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성대하게 개막됐다. "마라톤이 가장 마지막 날 경기를 하잖아요? 당시에는 솔직히 메달을 따 낸 것과 상관없이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부럽더라고요(웃음). 폐막할 때까지 주변 관광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역대 최고 성적을 올리고 있던 한국은 황영조가 마라톤 우승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두고 언론이 그때까지 메달리스트를 모아 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태릉선수촌에 걸려 있는 바르셀로나 대회 메달리스트 사진 속에 제가 없어요.(웃음) 그만큼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대회 마지막 날인 8월 9일,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①편 끝>…다음 주 ②편(6월 30일)에서는 황영조의 올림픽 일화, 이봉주와 라이벌에 대한 솔직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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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