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돌아갈 수 없기에 소중한 그곳의 기억은 영원에 이르는 고정된 시간 속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훤히 미소 짓는다. 크게 웃었는지, 흠뻑 울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기억속의 그, 혹은 그때 써 내려간 역사야 말로 지금의 우리를 위로해 준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본연의 민족주의적인 색채는 스포츠 속에 자연스레 투영돼 절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그래서 옛 시절의 스포츠 스타는 우리의 마음 속에 써 내려간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다. <더팩트>은 추억 속 전설이 돼버린 한국 스포츠계의 전설들을 만나 또 다른 내일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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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의 '적토마'에서 '전설'이 돼 버린 고정운 |
지난 13일 성남시 모란역 인근 풍생 고등학교. 프로축구 K리그 성남 일화의 U-18 유소년 팀으로 운영되고 있는 풍생고 축구부를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준 추억 속 주인공이 있다. 고정운(45).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의 적토마'이자 K리그에서 J리그로 이적한 1호 선수. 현재 유럽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지성 이청용 차두리 등 해외파 측면 공격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노라면 터치라인을 따라 질풍처럼 달리던 1990년대의 그를 떠올리게 된다. K리그 최초의 '40골-40도움'을 작성한 주인공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아 최고의 측면 공격수로 이름을 떨친 그가 망각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 있는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코리언 레전드>의 첫 페이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남 일화 U-18 감독으로 제2의 축구 인생을 살고 있는 고 감독은 현역 시절 못지않은 뛰어난 체격과 강인한 외모 속에서도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포근한 미소를 보였다. 인터뷰 당일 새벽, 박지성이 결승골을 넣은 유럽 챔피언스리그 첼시와의 8강전을 보고 나왔다는 고 감독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고 감독은 "한마디로 대단하죠.(웃음) 새벽에 경기를 지켜봤는데 리그 뿐 아니라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 주니까 정말 뿌듯합니다"라며 자연스레 박지성과 현 대표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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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남 일화 U-18(풍생고) 감독으로 변신한 고정운 |
◆ '포지션 후계자' 박지성…"성실한 모습에 감동 받는다"
"(박)지성이는 경기력도 좋지만, 무엇보다 '성실성'에 감동을 받아요. 어린 시절부터 습관화 된 성실성이야말로 축구 인생 최대의 플러스 요인이 됐죠. 그리고 시대적인 행운도 따랐고요. 어느 하나만 잘 돼서 성공할 수는 없어요. 최근 K리그에서 김호곤, 허정무 감독님도 선수들의 정신 자세에 대해 지적하셨죠. 현재 우리 젊은 선수들은 '물질 만능주의'에 다소 젖어 있지 않나 싶어요."
아시아에서 한국만큼 재능 있는 측면 공격수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국가는 드물다. 1970년대에는 차범근, 허정무가 있었고 1980년대 들어 변병주, 김주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고정운, 서정원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는 세계적인 수준의 측면 공격수를 갖게 된 한국 축구의 뿌리가 됐다.
"과거에는 측면 공격수들이 단순하게 볼을 찼거든요. 체력적인 우위를 앞세웠죠. 사이드 구역은 모두 나의 땅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죠. 그렇지만 지금은 사이드 뿐 아니라 중앙으로도 움직일 줄 알아야죠. 즉, 기술이 있어야 하고 볼을 영리하게 찰 줄 알아야 하죠. 또한 볼을 뺏기면 그 순간부터 수비수, 볼을 빼앗으면 그 순간부터 공격수예요. 특정 포지션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없죠. 그만큼 축구가 빠르고 좁은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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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역 시절 '고정운의 포효'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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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대표팀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고정운 |
고 감독은 박지성, 이청용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측면 공격수의 출현에 흐뭇해했다.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그들이야말로 한국 축구 발전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구자철, 손흥민 등 신예 선수들의 등장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조광래 감독님이 대표팀 세대교체를 훌륭하게 하신 것 같아요. 지난 1월 카타르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비록 일본에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에 보여 준 경기력과 신예 선수들의 발굴은 성공적이었죠. 특히 구자철, 지동원 같은 선수들은 아주 영리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자연스레 자신의 '포지션 후계자' 박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이에 고 감독은 "(박)지성이는 어린 나이가 아니잖아요? 은퇴를 결심하기까지 충분한 고민을 했을 것이에요. 일부에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다가오면 다시 대표팀에 복귀시키자고 하는데 저는 반대예요. 그때 가서 지금의 경기력을 보여줄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고요. 지성이가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돌이켜봤을 때 이 시점에서 아름답게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죠"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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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게 웃는 그의 미소 속에서 지나간 세월을 더듬어본다 |
◆ 국내 축구 감독? '방시혁 독설' 필요한 시대
후배 박지성의 이야기로 시작된 고 감독과의 대화는 최근 다양한 논란이 일고 있는 있는 K리그로 옮겨졌다. "축구는 지금 위기죠. 답보가 아닌 내려가는 상태라고 봐요. 일부 언론에서는 K리그 각 구단에서 관중 수를 부풀린다는 등 부정적인 기사도 나오고 있으니….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선수들도 반성을 많이 해야 해요."
최근 K리그는 '수비 축구'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며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도 고 감독은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빅 리그를 살펴보면 '빅4'들의 목표는 전부 우승이죠. 나머지 팀들은 2부리그 강등을 면하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예요. 그런데 빅4하고 경기를 하면 맞불을 놓는 팀들은 거의 없어요. 수비 축구를 하죠"라고 답한다.
이어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강팀들은 상대 팀이 수비 축구를 해도 골을 잘 넣어요. '수비 축구냐, 공격 축구냐'를 논할 문제가 아니죠. 결국 지도자들의 전술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의 개인 전술, 즉 기술이 겸비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오늘 새벽에 맨유-첼시전을 지켜봤지만 맨유의 축구는 '수비적인 성향'이 강했어요. 그렇지만 영국 언론에서 맨유의 수비 축구를 재미없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것은 선수들의 개인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에 역습 상황에서도 흥미로운 축구를 하기 때문"이라며 기술 축구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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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리그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있는 고정운 감독 |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작곡가 방시혁씨가 '독설'로 유명하잖아요? 지금 지도자들은 그런 것이 필요해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찾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때로는 독설도 중요하죠. 난 우리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너희들은 고등학생이지만, 이제 프로 선수다. 전문 직업인이다"라고. "왜? 지금 이 선수들은 진로를 변경할 수 없어요. 내가 변경을 하라고 해도 본인과 부모님들이 반대해요. 그렇다면 정말 프로 선수들처럼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죠. 열정을 갖고 해야죠. 편한 것만 찾고 좋은 것만 바라보면 안돼요."
◆ 달라진 축구 환경 "지도자의 철학이 분명해야"
고 감독은 지난 2001년 은퇴한 뒤 선문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거쳐 전남 코치, FC 서울 수석코치에 이어 지난해 성남 일화의 유소년 팀인 풍생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과거보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운동하는 후배들이 우려스러웠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감독님들께서 엄하시고, 스파르타식으로 지도하셨죠.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기량이 떨어졌던 선수들도 가능성이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같은 고등학교 1학년 선수가 입학했을 때, 잘했던 선수나 못했던 선수나 그대로 가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안타까워요. 살만한 시대가 되다 보니 정신적인 면이 약해지고 수동적인 교육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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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소년 지도자로 변신한 고정운 감독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
은퇴한 뒤 브라질에서 코치 연수를 하면서 고 감독은 현지 U-13~U-17 등 유소년 선수들의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 선수들 중에서 실제 클럽 1군 무대를 밟는 선수는 그야말로 바늘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이에 고 감독은 한국의 유소년들이 프로 클럽에 가입한 것을 큰 만족으로 여기고 나태해지는 풍조를 우려하며 일선 지도자들이 이러한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는 유소년 선수들 부모님들께 항상 말씀드려요. '좋은 것이 있는 반면에 독이 있다'고요.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나태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과거의 저희 세대보다 체격 조건과 재능은 훨씬 낫죠. 비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선수들이 조금만 힘들어도 금방 포기해요. 또한 선수들이 지도자를 평가하는 시대에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죠. 지도자 스스로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다소 격해지는 고 감독의 목소리 속에서 미래 한국 축구의 디딤돌이 될 유소년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가치관이 느껴졌다. 고 감독은 국내 축구 현실에 따라 학원 축구와 클럽 산하 유소년 축구가 분리돼 운영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프로팀에서는 클럽화에 대한 성공을 기약할 수 있고, 학원 축구는 자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에서다.
<①편 끝> ②편에서는 고정운의 학창 시절, 프로 및 국가대표 이야기와 함께합니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