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낭만 지운 모로코, 북중미를 뒤흔드는 '사막의 사자'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06.15 00:00 / 수정: 2026.06.15 00:00
14일 2026 북중미 월드컵 C조 1차전 브라질과 1-1
선제골 넣으며 '삼바군단'을 코너로 몰아붙여
모로코의 캡틴 아슈라프 하키미(가운데)가 14일 2026 북중미 월드컵 C조 1차전에서 브라질의 비니시우스(오른쪽)와 볼을 다투고 있다./뉴저지=신화.뉴시스
모로코의 '캡틴' 아슈라프 하키미(가운데)가 14일 2026 북중미 월드컵 C조 1차전에서 브라질의 비니시우스(오른쪽)와 볼을 다투고 있다./뉴저지=신화.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험준한 아틀라스산맥의 바람을 품은 아프리카의 강자 모로코가 다시 한번 세계 축구의 중심에서 포효했다. 14일(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은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강렬한 전율을 선사한 한판 승부였다. ‘영원한 우승 후보’이자 역대 최다(5회) 우승국인 ‘삼바 군단’ 브라질을 경기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붙인 끝에 거둔 1-1 무승부. 전광판의 숫자는 균형을 이뤘지만, 그라운드를 지배한 밀도와 기세에서 판정승을 거둔 쪽은 명백히 모로코였다.

과거 우리에게 모로코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의 아련한 낭만이나 이국적인 사막 풍경으로 먼저 기억되던 나라였다. 하지만 이제 모로코라는 이름 석 자는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가장 단단하고 치명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신흥 강호의 고유명사로 각인되고 있다. 4년 전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의 거함들을 연이어 무너뜨리며 '아프리카 최초의 4강 신화'를 쓸 때만 해도 이를 '기적' 혹은 '이변'이라는 단어로 폄하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북중미 무대에서 브라질을 코너로 몰아넣은 모로코의 경기력은 그들의 성장이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당당히 증명했다.

모로코는 더 이상 후방에 밀집 수비 블록을 세우고 역습 한 방만을 노리던 4년 전의 '도전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7위까지 치솟아 브라질(6위)의 턱밑까지 추격한 어엿한 우승 후보였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누사이르 마즈라위(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네일 엘 아이나위(AS 로마)가 주도한 왼쪽 측면 공격은 브라질의 호화 수비진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결국 전반 21분, 브라힘 디아스(레알 마드리드)의 송곳 같은 침투 패스를 받은 이스마엘 사이바리(PSV 아인트호번)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의 키를 넘기는 감각적인 칩슛으로 선제골을 터뜨렸을 때, 뉴저지 스타디움은 거대한 함성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브라질의 에이스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오른쪽 풀백 아슈라프 하키미(파리 생제르맹)의 헌신적인 수비와 파괴적인 오버래핑이었다. 하키미는 바로 PSG에서 한국의 이강인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어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선수여서 더 반가움을 준다. 비록 전반 32분 비니시우스의 개인 전술 한 방에 동점골을 허용하긴 했으나, 모로코는 경기 내내 중원의 강한 압박과 정교한 패스 워크로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클럽 무대의 거장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조차 후반 들어 수비적인 전술 수정을 감행해야 했을 정도로 모로코의 공세는 매서웠고 조직적으로 치밀했다.

동양의 오랜 지혜인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처럼, 뒤에 오는 이들이 앞선 이들의 성과를 뛰어넘을 만큼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모로코 축구의 무서움은 4년 전 4강 신화를 일군 하키미, 부누 등 베테랑들의 건재함 위에, 지난해 FIFA U-20 월드컵 우승을 이끈 젊은 재능들이 완벽하게 수혈되었다는 점에 있다. 사령탑 교체라는 갑작스러운 내홍 속에서도 모하메드 우아비 감독 체제의 모로코는 흔들리지 않는 신구 조화를 선보였다.

세계 축구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모로코가 보여준 축구 인프라에 대한 장기적 투자는 눈부시다. 이제 그들은 영화 속 대사인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같은 감상적인 낭만 대신, 그라운드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교한 기술과 강인한 체력의 '축구 매니지먼트'로 국가 브랜드를 완전히 리브랜딩하고 있습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펠레는 생전에 "축구는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게임(The Beautiful Game)"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모로코가 보여주는 축구가 바로 그렇다. 견고한 방패 속에 감춰둔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는 전술적 유연성은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 그들이 다시 한번 카타르의 영광을 넘어 최종 왕좌까지 넘볼 수 있는 강력한 후보임을 선언하는 신호탄이었다. '삼바 군단'을 멈춰 세운 사막의 사자들이 써 내려갈 새로운 서사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가 목격할 가장 아름답고 역동적인 드라마가 될 것이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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