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 멈추고 싶은 멈춰야 하는④] '평행선' 위 제조물책임법 개선 방향은
입력: 2024.08.24 06:00 / 수정: 2024.08.24 10:36

'제조사가 입증책임' 골자 제조물책임법 6건 계류
野 "정보 균형성 맞춤 필요"…공정위 "신중 검토"


현행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간접사실을 증명하면 제조업자가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이를 증명하는 것도 어려워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더팩트 DB
현행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간접사실을 증명하면 제조업자가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이를 증명하는 것도 어려워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더팩트 DB

'시청역 참사' 등을 계기로 차량 급발진 문제와 고령 운전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지고 있고, 고령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악화일로다.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을 온전히 운전자의 실수로 돌리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상대적 사고율이 높다는 통계만으로 고령 운전자의 면허 반납 요구도 설득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노인들의 이동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은 물론 지자체별 혜택 차이 등 실효적 측면은 깊이 고민할 지점이다. <더팩트>는 총 6회에 걸쳐 국내외 급발진 사례와 판례,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제조물 책임법과 고령 운전자 면허 반납에 대한 한계를 짚어보고 방향을 제시해 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신진환·김정수 기자] '제품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한 경우, 소비자 측에서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점과 어떤 자의 과실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정을 증명하면 …중략… 그 결함으로 말미암아 사고가 발생했다고 추정해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도록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손해의 공평·타당한 부담을 그 지도원리로 하는 손해배상제도의 이상에 맞다.'(대법원 2004. 3. 12. 선고 2003다16771 판결)

자동차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갑자기 엔진에서 굉음이 발생하며 차 속도가 빨라지고, 차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일부 차주는 브레이크등에 불이 켜졌는데도 차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하기도 한다. 이때 운전자는 차량 결함에 따른 피해자인가, 사고를 낸 가해자인가. 민형사상 책임은 다르다. 민법상 특별법인 '제조물책임법'은 제품의 결함과 손해의 입증책임은 소비자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급발진 의심 사고를 낸 운전자라면 소비자인 차주가 주행한 차의 결함을 증명해야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차량의 구조와 시스템, 첨단전자 장비 등 구체적 설계를 몰라 결함을 입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제조업체의 귀책 사유를 증명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공정 논란을 수반하는 정보의 비대칭은 소비자의 권익을 해치는 요소다. 정치권에서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입증책임의 주체 등 제조물책임법은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까.

지난 7일 기준, 22대 국회에서 6개의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 법안들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제조물에 대해 소비자가 피해를 봤을 경우 제조업자가 당시 제품의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기본 취지는 비슷하다. 아울러 민사소송법에 규정된 문서제출명령보다 강화된 자료제출명령을 도입하는 내용이 담긴 법안도 있다. 제조물을 자동차에 한하면, 급발진 의심 사고가 생겼을 때는 완성차 업체가 소프트웨어 결함 등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급발진 의심 사고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지난 18대 국회(2008~2012년)에서도 기본 취지가 같은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 차량에 탑승해 숨진 이도현 군(당시 12세) 사건을 계기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도현이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 속에서도 법안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2017년 소비자의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법 개정이 있었다. 당시 국회는 간접사실을 입증하면 결함 및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다만 △해당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손해 발생 사실 △그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 초래했다는 사실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비자가 간접적으로라도 입증하도록 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허영 민주당 의원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21대 국회 때 입증책임 전환의 내용이 담긴 제조물책임법 개정을 두고 여야 간 이견이 없었다"며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반대했다"고 말했다. 허 의원은 소송에 나선 소비자-제조사 간 정보의 균형성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고, 영업비밀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비밀유지명령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예 제조사의 입증책임으로 전환한다면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주무부처인 공정위는 제조업체에 책임을 강화하는 법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태도다. 지난해 6월 국회 정무위원회 2소위원회 회의에서 실제 여야 위원들은 큰 틀에서 소비자가 차량 결함을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 공감하며 제조업자로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윤수현 당시 공정위 부위원장은 ①민사소송의 대원칙인 입증책임 분배의 공평성 ②제품의 결함과 손해의 인과관계 전부를 제조업자가 입증하는 입법례가 전무 ③산업계의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 등의 이유로 법 개정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제조업체에 책임을 강화하는 법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더팩트 DB
공정거래위원회는 제조업체에 책임을 강화하는 법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더팩트 DB

이러한 신중론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소비자와 제조업체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리를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통화에서 "법리적으로 (입증 책임) 전환의 경우 민법상 손해배상 책임의 대원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있음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나 필요성 부분을 살피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소비자 보호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입증책임이 전환된다고 하면 제조사에서는 소송 남용 우려와 입증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다. 공정위는 양측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데 무게를 둬야 한다는 게 자동차업계의 견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관계자는 통화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의 발생 원인에 대해 논의하기보다는 사고 발생을 예방하기 위한 장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사고기록장치(EDR),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ACPE), 비상자동제동장치(AEBS) 개선·개발 등에 우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2017년 소비자의 입증책임이 완화된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졌는데도 더 완화한다면 분쟁이 너무 과도해질 우려도 있고, 오히려 블랙컨슈머(악성 소비자)를 많이 양성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미국·일본·EU(유럽 연합)에서도 명백한 오작동일 경우에만 제품의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이미 결함 추정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면서 "입증책임을 온전히 제조업체가 지게 된다면 작은 규모의 자동차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2022년 12월 6일 강릉 홍제동에서 할머니와 쌍용차 티볼리 차량을 타고 있던 이도현 군(당시 12세)은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졌다. 사진은 사고 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된 사고 차량 모습. /이상훈 씨 제공
2022년 12월 6일 강릉 홍제동에서 할머니와 쌍용차 티볼리 차량을 타고 있던 이도현 군(당시 12세)은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졌다. 사진은 사고 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된 사고 차량 모습. /이상훈 씨 제공

자동차는 일반 가전 등과 달리 소비자보호법 등에 의해 소비자의 권익이 보호받지만 자동차의 경우는 특수하다. 운전자의 조작 등 외부적 요인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차량은 다른 일반 제조물과 다르게 접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시민교통안전협회 김기복 회장은 통화에서 "급발진 원인을 소비자가 밝히도록 한 것은 근본적·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정치권과 학계, 자동차제조사 등 전문가 집단이 결론을 내리 어렵더라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제조사가 책임을 져야 문제가 개선될 것"이라며 "국민인 소비자가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떠안고 피해 보상도 못 받는 상황은 대단히 억울하고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달 23일 국무회의에서 자동차 제작사 등이 결함조사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결함으로 추정하는 내용이 담긴 자동차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면서 급발진 의심 차량 제조사가 사고 차량 관련 자료를 내지 않으면 차량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게 됐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급발진 의심 사고로 아들을 잃은 고(故)이도현 군의 부친 이상훈 씨는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22대 국회 국민청원(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입증책임 전환을 위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에 지난 국회 때보다 훨씬 많은 9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차량 소프트웨어 오류가 0.01%의 가능성만 있다면 급발진이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번 국회가 하루빨리 법을 개정해 제조사의 완전한 입증 책임의 제조물책임법이 내년부터라도 시행됐으면 한다. 더는 국민의 목소리가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shincombi@tf.co.kr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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