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연극이라 했다. 중도에 막이 내려지는 연극은 의미가 없듯, 다채로운 삶 가운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과 연이 닿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당당하다. 이상훈(40)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야구 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왼손 투수지만 예기치 않은 역경과 마주하며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 미국 프로야구,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한참 못 미치는 짧은 한국 프로 야구 역사에서 숱한 수준급 선수들이 배출됐지만 글쓴이가 이상훈을 '코리언 레전드'로 꼽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만의 뜨겁고도 격렬했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러 수준급 선수들의 행보와 다른 면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훈은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다. 1993년 당시 신인 최고 연봉을 받고 LG에 입단한 그는 데뷔 첫해 9승(9패)을 기록했다. 이듬해 18승(8패)으로 다승왕에 오르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95년 세운 좌완 선발 20승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1996년 어깨 부상으로 이듬해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바꾼 뒤 47세이브 포인트(10 구원승 37세이브)로 구원 부문 신기록을 수립했다.
위력적인 투구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갈깃머리에서 나온 것 아니냐는 유머가 나돌 정도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화제의 중심이었다. 찬란한 영광 속 쓰디쓴 아픔도 맛봤다. 2004년,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선 채 깜짝 은퇴를 선언했다. 로커 변신을 선언하며 음악인의 삶을 택했다. 2년 전, 친정팀 LG와 빚어진 갈등으로 또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 이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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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라운드의 야생마' 이상훈(40)이 전설이 돼 돌아왔다 |
19일,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이날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이상훈 야구교실(47 Rock Baseball Club)에서 '코리언 레전드' 아홉 번째 주인공인 그를 만났다. 록 그룹 왓(What)의 보컬로 활동하며 음악을 만난지도 어느덧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남양주시 와부읍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야구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살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요즘에는 야구를 하는 사람들이나, 보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을 느끼죠."
◆ '4집 준비' 이상훈 "인기 몰이? NO, 그저 음악을 열심히…"
음악 이야기로 대화을 시작했다. 정규 앨범도 어느새 3장이나 발매했다. 물론 이상훈에게는 단순히 음반의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7년의 시간은 격렬했다. '음악'은 삶의 전환점 이상이었다. "최근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1~3집에 수록돼 있는 곡 가운데 공연 때 많이 불렀던 곡을 30곡 정도 선별했어요. 새로운 느낌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공연 장소는 홍대 클럽과 지방을 넘다들었다. 부산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부산은 서울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어요. 그래봤자 10~20명 정도지만. 비주류 음악을 하다 보니…. 그렇다고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비주류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고요. 그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죠."
"(클럽) 사장님 한 분만 놓고 공연을 한 적도 있어요. 이후 한 명씩 늘어나면서 좋은 경험을 했죠. 경제적인 이득을 떠나서 일반 가수들과 다른 우리만의 교훈을 얻는 것이 많아요. (방송이나 마케팅에 대한 생각은) 방송을 하려면 매니저가 있어야 하고, 우리와 일을 하려는 목적이 분명해야죠.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음반 발매를 하고, 공연을 하는 것이 최고의 마케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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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깜짝 '로커 변신'은 야구 팬을 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
"(팬들은 '이상훈' 브랜드로 마케팅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이상훈 밴드가 되는 것이죠. 팀이 아니고요. 내 중심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밴드 음악 환경이 다소 힘들잖아요? 열심히 하고 오래하는 것이 중요해요. '쑥' 나와서 3~4명 모아 놓고 얼굴 메이크업이나 신경 쓰고 인기 몰이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음악인이 아니죠. 음악을 하려면 그저 음악만 열심히 하면 되죠."
◆ "LG팬들의 그리움? 마음이 아파" 언제 적 이상훈을…
은퇴 후 이상훈의 로커 변신을 두고 팬들이 설왕설래했다. 혹여 현실과 괴리를 느끼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전혀 없었어요. 단, 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지켜보시는 분들께서 '쟤는 야구 선수였으니까' 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죠. 정규 앨범 3장까지 냈으면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웃음) 야구 선수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아마, 평생 가겠죠."
멤버 간의 단결심은 강하다. 무대 행위도 점차 발전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본 적도 없죠.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는 것이 다였는데, 스스럼없이 받아 주고 도와 준 사람들이 멤버들이었죠." 음반을 내고 공연을 기획하고 서로의 생각을 모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는 것도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왓'의 꿈은 한 걸음씩 성장하고 있다.
"(야구 팬들도 공연장을 찾나) 처음 1년째에는 찾으셨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오시지 않았으면 했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아서요.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고맙게 생각하죠. 하지만 시집, 장가 가서 잘 살고 계신 분들이 언제 적 이상훈이라고 아직까지…. 나를 찾아 준다는 것은 고마운 것이잖아요. 인터뷰를 할 때마다 말했지만 팬들을 잊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에요."
"LG 팬들이 아직까지 나를 기억해 주고 찾는 것이 사실 마음이 아파요. LG가 더 잘해서 옛날 사람들을 추억에 담고, 현재 선수들을 더욱 기억해 줬으면 하거든요. 부족한 무언 가로 인해 옛날 선수들을 찾고, 그리움 이상의 것으로 표현하시기 때문에…. 내 팀도 아닌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LG가 잘해서 과거의 영광이 추억으로 잘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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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훈은 아직도 후배 투수들의 본보기가 되곤 한다 |
◆ 후배들의 '롤 모델' 이상훈 "창피하고 쑥스럽죠. 후배들은…"
이상훈은 최근 LG 모 기업이 주관한 한 행사에 참여했다. 팬들과 SNS를 통해 대화를 갖는 흔치 않는 일이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죠. SNS 상에서 팬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제가 야구를 했을 때는 상상할 수 없었죠. 저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잘 다루지를 못해요. 단, 이런 공간에서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구나 생각을 했죠. 그런데 글을 한 편 쓰는 것이 훨씬 낫겠더라고요.(웃음)"
LG 올드 팬들은 이상훈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아직도 설레인다. 환희와 좌절의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더욱 그렇다. 박현준, 임찬규 등 LG 소속 투수들 뿐 아니라 김광현, 김선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투수들도 이상훈을 롤 모델이라고 말한다. "창피하고 쑥스럽죠. (김)선우나, (김)광현이, 요즘 젊은 투수들의 기량이 참 좋아요. 옛날 선수들이 투박했다면 지금은 참 세련되고 기술이 좋죠. 그만큼 한국 야구가 발전했고요."
"아무리 후배 선수이지만 그렇게 재능 있는 선수들이 나를 롤 모델이라고 이야기 해 주면 멋쩍기도 하고, 기분도 좋죠. (임)찬규 같은 경우에는 제가 어렸을 때 경기장에 가서 프로야구 선수들을 지켜보고 사인을 받았는데 어느새 그 선수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신비로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나이라고 봐요." <①편 끝>…다음 주 ②편(7월 29일) 에서는 이상훈의 파란만장한 현역 시절 일화가 이어집니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이상훈 제공>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