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에서 가장 위험한 착각은 경기가 끝나기 전에 승리를 계산하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 팀에 리오넬 메시가 뛰고 있다면 그 계산은 오만에 가까워진다.
아르헨티나는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에 2-1 역전승을 거두고 2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잉글랜드는 후반 10분 앤서니 고든의 선제골로 앞섰지만, 아르헨티나에는 경기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메시가 있었다.
승부의 갈림길은 후반 27분이었다. 잉글랜드 토마스 투헬 감독은 득점한 고든을 빼고 수비수 에즈리 콘사를 투입했다. 공격의 칼을 너무 일찍 칼집에 넣었다. 이어 댄 번과 니코 오라일리까지 투입하며 수비벽을 높였다. 잉글랜드의 포메이션은 사실상 5백을 넘어 골문 앞에 사람을 쌓아놓는 형태로 변했다.
그러나 수비수가 많다고 반드시 수비가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공격 의지를 잃은 팀은 공을 소유하지 못하고, 공을 소유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계속 공격할 기회를 준다. 투헬은 1-0을 지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메시에게 생각할 시간과 패스할 공간을 내줬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악연은 1986년부터 이어졌다. 포클랜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멕시코 월드컵 8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신의 손’과 ‘세기의 골’을 동시에 만들었다. 1998년에는 데이비드 베컴의 퇴장과 잉글랜드의 승부차기 패배가 있었고, 2002년에는 베컴이 페널티킥으로 복수했다. 두 나라의 맞대결은 늘 단순한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2026년 그 역사적 무대의 주인공은 메시였다. 메시는 직접 골을 넣지 않았지만 2개의 도움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후반 41분에는 페널티지역 정면에서 무리하게 슈팅하지 않고 뒤로 공을 내줘 엔조 페르난데스의 중거리 슛 동점골을 만들었다. 골문 앞에 촘촘하게 수비벽을 쌓았던 잉글랜드는 허무하게 동점골을 내줬다. 추가시간에는 주발인 왼발이 아닌 오른발 크로스로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의 역전 헤더골을 이끌었다.
메시의 천재성은 화려한 드리블이나 강력한 슈팅에만 있지 않다. 진정한 천재성은 모두가 같은 장면을 볼 때 혼자 다른 길을 발견하는 데 있다. 동점골 장면에서 잉글랜드 수비는 메시의 왼발 슈팅을 예상해 한쪽으로 쏠렸다. 메시는 그 움직임을 읽고 반대 방향 후방의 페르난데스를 선택했다. 결승골 장면에서도 왼발이 아닌 오른발로 정확한 크로스를 올렸다. 수비수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메시는 알고 있었다.
메시의 이번 대회 활약은 잉글랜드전 한 경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조별리그부터 득점과 도움을 쌓으며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이끌었고, 토너먼트에 들어서면서 더욱 강해졌다. 특히 이집트와의 16강전에서는 아르헨티나가 0-2로 끌려가던 절체절명의 순간 두 골에 직접 관여하며 3-2 대역전승의 중심에 섰다.
메시는 페널티킥 실축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반 막판 추격의 불씨를 살린 골을 터뜨렸고, 이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득점까지 만들어냈다. 아르헨티나는 불과 13분 동안 세 골을 몰아치며 탈락 위기에서 살아났다. 보통 선수라면 실축의 기억에 갇힐 상황에서 메시는 오히려 경기의 주인이 됐다.
잉글랜드전에서는 골 대신 도움으로 승리를 만들었다. 이집트전에서 직접 해결했다면, 준결승에서는 동료를 활용해 수비벽을 허물었다. 골이 필요할 때는 골을 넣고, 패스가 필요할 때는 가장 좋은 위치의 동료를 찾아냈다. 이것이 단순한 골잡이와 위대한 경기 지배자의 차이다.
젊은 시절의 메시는 상대보다 빨리 달렸다. 지금의 메시는 상대보다 먼저 생각한다. 스피드는 세월과 함께 줄어들 수 있지만, 시야와 판단은 경험이 쌓일수록 깊어진다. 이것이 39세의 메시가 여전히 월드컵 승부를 지배하는 이유다. 메시는 이번 대회에서 8골 4도움을 기록하고 있다. 득점 순위에선 단독 1위로 골든부트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고 도움 순위에서도 공동 2위권의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투헬은 메시의 체력과 활동량은 계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메시의 두뇌와 경험까지 계산하지는 못했다. 선제골 이후 잉글랜드가 라인을 내리고 공격수를 뺀 순간, 메시에게 경기를 설계할 권한을 넘겨줬다. 명장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지만, 위대한 선수는 감독의 선택 자체를 약점으로 만든다.
손자병법에는 "승리는 적이 스스로 패할 틈을 기다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뜻의 말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잉글랜드가 스스로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에 갇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메시가 그 틈을 정확히 찔렀다.
40년 전 마라도나가 잉글랜드의 심장을 무너뜨렸다면, 이번에는 메시가 두 번의 패스로 잉글랜드를 침묵시켰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위대한 선수들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기억을 되살린다.
투헬은 메시를 너무 일찍 끝난 선수로 판단했다. 그러나 메시의 축구는 다리가 아니라 머리에서 시작된다. 잉글랜드가 지키려 한 것은 한 골의 리드였지만, 아르헨티나가 믿은 것은 한 명의 천재였다.
결국 한 골은 무너졌고, 천재는 살아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