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약자 위한 '쉬운 판결문' 첫선
  • 설상미 기자
  • 입력: 2026.07.03 00:00 / 수정: 2026.07.03 00:00
법률용어 대신 쉬운 문장·삽화
장애인 사법 접근성 높여
서울행정법원이 쉬운 문장과 그림으로 판결 이유를 풀어 쓴 이지리드(Easy-Read) 판결문을 처음 선보였다./서울행정법원
서울행정법원이 쉬운 문장과 그림으로 판결 이유를 풀어 쓴 '이지리드(Easy-Read) 판결문'을 처음 선보였다./서울행정법원

[더팩트ㅣ설상미 기자] 서울행정법원이 지적장애를 가진 소송 당사자를 위해 법률 용어 대신 쉬운 문장과 그림으로 판결 이유를 풀어 쓴 '이지리드(Easy-Read) 판결문'을 처음 선보였다. 대법원이 올해 시행한 사회적 약자 사법지원 예규에 따른 첫 사례다. 장애인의 사법 접근성을 넓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강우찬 부장판사)는 지난달 25일 지적장애인 A 씨가 서울 양천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정도 미해당 결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A 씨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일반 판결문과 함께 A씨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한 5쪽 분량의 이지리드 판결문도 따로 제공했다.

A 씨는 2023년 11월 양천구에 지적장애인 등록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구는 병원의 지능검사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고 어린 시절 IQ가 70을 넘었던 이력 등을 이유로 A씨를 지적장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A 씨는 이의신청과 행정심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A 씨는 최근 수년간 세 차례 실시한 지능검사에서 모두 IQ 70 미만의 결과를 받았다. 여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지적장애 진단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시설에서 성장했으며, 중학교 무렵부터 우울증과 강박 증상, 뇌전증 등을 겪으며 장기간 정신병원에서 생활해왔다.

재판부는 양천구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지적장애 여부는 지능지수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실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적응 능력까지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판결 내용을 원고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 판결문과 별도로 이지리드 판결문도 작성했다. 20쪽이 넘는 일반 판결문을 5쪽으로 압축하고, 결론을 먼저 제시한 뒤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큰 글씨와 삽화를 활용했으며 어려운 법률 용어도 일상적인 표현으로 바꿨다.

서울행정법원 제5부 재판부는 윤관 대표의 청구를 기각하고, 재판 비용을 윤관 대표가 부담한다고 판결했다. /더팩트 DB
서울행정법원 제5부 재판부는 윤관 대표의 청구를 기각하고, 재판 비용을 윤관 대표가 부담한다고 판결했다. /더팩트 DB

일반 판결문의 "피고가 한 장애 정도 미해당 결정 처분을 취소한다"는 주문은 "원고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로,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는 문구는 "소송에 들어간 돈은 구청이 냅니다"로 쉽게 풀어 썼다.

판결 이유 역시 법률 용어 대신 당사자의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바꿨다. "오랫동안 당신을 직접 만나고 치료한 의사들의 말은 믿을 만합니다",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정신병원에서 살았습니다", "판사도 법정에서 당신을 직접 만나 보통의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등 쉬운 표현을 사용했다.

이어 판결의 효과는 "구청의 결정은 사라집니다", "당신은 지적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법이 정한 장애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안내했다.

법원은 올해 시행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사법접근 및 사법지원에 관한 예규'에 따라 이지리드 판결문을 작성했다. 이 예규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판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 등 보조자료를 활용한 이해하기 쉬운 자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삽화는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제작됐다.

법원 관계자는 "2021년경 이지리드 판결문을 작성할 당시와 비교하면 제작 환경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며 "생성 비용도 사실상 유료 구독료 외에는 들지 않게 돼 효율이 극대화됐다"고 말했다.

법조문 한글화에 이어 쉬운 판결문 도입 역시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높이는 또 하나의 변화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판결문은 일본식 한자어와 법률 전문용어, 긴 문장 때문에 일반 국민은 물론 장애인 등 사법 취약계층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 로펌 변호사는 "사법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는 그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고, 최근 법조문 한글화도 일반 국민의 법률 접근성을 높인 사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예전 판결문은 한 문장이 한 페이지 가까이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문장도 많이 간결해졌다"며 "쉬운 판결문 제도 역시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snow@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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