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감독은 팀을 바꾸지만 선수 한 명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수원삼성 이정효 감독이 축구에 있어 현대 전술과 감독의 영향력을 대변하며 던진 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시스템의 한계를 비웃듯 선수 한 명이 팀을 바꾸고, 나아가 축구의 패러다임 전체를 뒤흔든 사례는 존재해 왔다. 이른바 전 세계를 호령한 ‘축구황제’들이다. 이들은 모두 이른 나이부터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을 뿜어내며 국제무대에 등장했고, 끝내 전 세계 축구계를 지배해 온 ‘축신(軸神)’들이었다
펠레가 월드컵으로 축구의 신화적 서막을 열었고, 마라도나는 수비수들의 무자비한 태클과 육탄 공세를 온몸으로 깨부수며 축구란 결국 전술판 위의 바둑돌이 아닌 인간의 거친 야성이 펼치는 드라마임을 증명했으며, 메시는 극한으로 발달한 현대 축구의 수비 전술과 압박의 족쇄를 완전히 무력화한 채 15년간 신계에 군림했다.
2022년 카타르의 겨울, 메시가 마침내 월드컵을 들어 올리며 'GOAT(The Greatest Of All Time)'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전 세계 축구계는 기쁨과 동시에 기묘한 공허함에 휩싸였다. "이제 인간의 축구를 지배할 다음 군주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건너뛰고, 단 한 명의 소년에게로 수렴하고 있다. 스페인과 FC 바르셀로나의 모든 미래를 짊어진 천재, 라민 야말(Lamine Yamal)이다. 고작 만 18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 권위의 2025년 발롱도르 득표 2위라는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데 이어, 2025~26시즌 바르셀로나를 2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스페인 라리가 올해의 선수에 오른 이질적인 천재. 이제 전 세계의 시선은 3개국 공동 개최로 열리는 이번 북중미 월드컵으로 향한다. 우리는 과연 이번 무대에서 펠레-마라도나-메시를 잇는 새로운 황제의 찬란한 대관식을 목격할 수 있을까.
◆ 시스템 축구의 파괴자, '티키타카 2.0'의 핵심 단검
과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티키타카 1.0'은 숨 막히는 점유율과 패스 마스터들의 정교함으로 상대를 얼어붙게하는 축구였다. 하지만 전술의 발전과 밀집 수비의 고도화로 인해 말기에는 '지루한 횡패스'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현재 스페인이 구사하는 '티키타카 2.0'의 유기적인 전술이 과거와 궤를 달리하는 이유는 바로 야말이라는 '압도적인 크랙'의 존재 덕분이다. 그가 측면에서 공을 잡는 순간, 상대 수비진 전체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정교한 드리블과 현란한 탈압박, 치명적인 왼발 킥으로 상대의 가장 취약한 곳을 순식간에 찔러 무너뜨리는 역동성. 과거의 스페인이 정교한 패스워크로 상대 수비 사이사이를 미세하게 쪼개며 들어가는 아기자기한 플레이였다면, 지금 야말이 이끄는 스페인은 빈틈이 보이는 순간 단숨에 골문을 직격하는 직선형 축구에 가깝다.

◆ 1958년의 펠레, 그리고 현대 축구의 필연적 황태자
이처럼 경기장 위에서 시스템을 파괴하는 야말의 서사가 유독 전율 돋는 또 다른 이유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당시 만 17세의 나이로 세계를 정복했던 펠레의 신화적 등장과도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10대의 나이에 이미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고 세계 중심에 선 천재는 축구사를 통틀어 오직 펠레와 야말뿐이다. 2007년생 라민 야말은 펠레와 같은 만 17세의 나이에 유로 2024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본인이 스페인의 현재이자 미래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다만 1958년 월드컵은 펠레가 전 세계가 존재조차 몰랐던 원석이 갑자기 튀어나온 '충격의 서사'였다면, 이번 월드컵의 야말은 전 세계의 숨 막히는 분석과 견제를 온몸으로 뚫어내야 하는 '필연적 황태자의 대관식'에 가깝다. 압박의 강도와 수비 전술이 극한으로 발전한 21세기 현대 축구에서, 고작 10대의 소년이 전술의 키를 쥐고 왕좌로 진격한다는 것은 '천재의 등장'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 마라도나의 '야성'과 야말이 마주한 왕관의 무게
마라도나가 세계 축구를 온전히 지배했던 기간은 1986년부터 1990년까지, 그의 나이 20대 중후반에 이룩한 격정적인 5년이었다. 상대 수비진이 그를 잡기 위해 사슬을 채우듯 매달려도 끝내 짓밟히지 않고 적진을 유린했던 '독보적인 거인의 독주'. 그것이 마라도나가 세계 축구사에 새긴 가장 강렬한 낙인이었다.
반면, 이제 막 만 18세가 된 라민 야말은 마라도나가 완숙한 전성기에 이르러 누렸던 그 절대적인 위상을, 고작 10대의 나이에 미리 당겨와 재현하려 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야말이 마주할 숙명 역시 1986년의 마라도나와 지극히 닮아있다. 사방에서 가해지는 상대의 집중 견제와 무자비한 육탄 공세를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야말이 그 집요한 수비를 끊어내고 이번 무대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마라도나의 5년을 넘어 향후 15년을 지배할 새로운 군주의 탄생을 목격하는 셈이다. 그가 보여줄 퍼포먼스는 1986년 아즈테카 스타디움에서 상대 수비진을 추풍낙엽처럼 무너뜨리며 60m 폭풍 드리블을 작렬했던 마라도나의 독주처럼, 시대를 초월한 예술로 승화될 일만 남았다.

◆ '제2의 메시'를 넘어: 라 마시아의 적통이 이어받은 유산
축구계에서 '제2의 메시'라는 왕관은 그동안 수많은 유망주를 주저앉힌 독이 든 성배였다. 그러나 야말은 그 무게를 비웃듯 메시의 발자취를 가장 완벽하게 복제하며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시스템 '라 마시아'가 낳은 최고의 걸작이라는 태생부터, 오른쪽 측면을 파괴하는 거침없는 왼발잡이 윙어라는 정체성까지 둘은 완벽히 닮아있다.
전문가들이 야말에게서 메시의 향기를 맡는 진짜 이유는 나이답지 않은 경이로운 축구 지능(IQ) 때문이다. 야말은 전성기 시절의 메시처럼 경기 상황을 냉철하게 읽는다. 언제 템포를 조절해야 하는지, 언제 상대 수비의 시선을 끌고 반대편 공간으로 치명적인 킬패스를 찔러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메시가 20대 시절의 폭발적인 드리블러에서 30대 시절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마스터로 진화했다면, 야말은 신체적 전성기가 오기도 전에 이미 그 두 가지 능력을 체득한 채 성인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 메시가 카타르에서 완성한 ‘세계 정복’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축구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적통 후계자가 북중미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댄스를 출 준비를 마친 셈이다.

◆ 춘추전국시대의 머리 위, 홀로 솟아오른 유일한 태양
당초 킬리안 음바페와 엘링 홀란이 메시·호날두의 시대를 이어받아 완전한 분점을 이룰 줄 알았던 세계 축구계는, 그 아래 세대에서 주드 벨링엄(22·잉글랜드), 알렉산다르 파블로비치(22·독일), 아르다 귈러(21·튀르키예), 에스테방 윌리안(19·브라질), 워렌 자이르-에메리(20·프랑스) 같은 천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야말은 그 내로라하는 천재들의 머리 위에서 홀로 발롱도르 2위를 찍으며 '규격 외의 태양'으로 솟아올랐다. 벨링엄이나 파블로비치, 자이르-에메리, 귈러 같은 동세대 최고의 신성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차세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을 때, 라민 야말은 이미 그 천재들의 체급을 한참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동시대 또래들과의 비교를 전면 거부한 채 펠레와 마라도나, 메시의 위대한 그림자를 쫓는 소년. 그것이 현재 야말이 가진 진짜 무서움이다.
현존하는 위엄 리오넬 메시가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바로 그 무대에서, 세계 축구는 자연스럽게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절대 군주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월드컵이라는 가장 거대한 무대, 북중미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야말의 발끝은 이미 세계 정상을 겨누고 있다. 이번 월드컵이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위대한 거장의 마지막 황혼과 새로운 군주의 서막이 한 하늘 아래에서 교차하는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된다 한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