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일수록 빛나는 한민족 DNA, 축구 이어 야구도 '도쿄의 기적'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03.10 09:04 / 수정: 2026.03.10 11:05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6 WBC 조별리그 C조 4차전 한국과 호주의 경기에서 7-2로 승리해 WBC 본선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주장 이정후를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도쿄=뉴시스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6 WBC 조별리그 C조 4차전 한국과 호주의 경기에서 7-2로 승리해 WBC 본선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주장 이정후를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도쿄=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기묘한 공통점이 있다. 평탄한 길에서는 때로 흔들리지만, 등 뒤가 천길낭떠러지인 벼랑 끝에 서면 이내 무서운 집중력과 투혼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위기가 닥칠수록 하나로 뭉쳐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 그것은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견뎌낸 한민족의 핏속에 흐르는 고유한 DNA다. 그리고 이 위기 극복의 DNA는 언제나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 무대에서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며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펼쳐진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굳게 믿었던 경제의 둑이 무너지며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의 초입에 서 있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평생 일군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적지에서 후반 막판 이민성의 통쾌한 역전 중거리포가 터진 순간,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극적인 2-1 대역전승은 상실감에 빠진 국민들에게 "우리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강력한 위로이자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불굴의 투혼은, 훗날 혹독한 구조조정을 견디고 장롱 속 금붙이까지 기꺼이 내어놓았던 국민들의 뼈를 깎는 인내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흐른 2026년 3월 9일, 이번에는 도쿄돔에서 또 다른 기적이 완성됐다. 극도의 국제 정세 불안정과 장기화된 경제적 불확실성이 겹치며 온 국민이 피로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지금, 한국 야구 대표팀은 17년 묵은 WBC 잔혹사를 끊어내며 통쾌한 8강 진출을 이뤄냈다.

사실 호주전을 앞두고 한국의 8강 진출 경우의 수는 희박했다. 반드시 승리해야 함은 물론, '2실점 이하'와 '5점 차 이상 승리'라는 가혹한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한민족의 끈기는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투수진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상대 타선을 2점으로 꽁꽁 묶었고, 타선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7점을 뽑아냈다.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기어코 완수해 낸 것이다.

경기 종료 후, 캡틴 이정후가 후배들에 둘러싸여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승리의 환희 그 이상이었다. 화려한 타이틀을 내려놓고 오직 조국의 승리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리더의 눈물, 그리고 "정후 형과 함께 야구해서 행복하다"는 후배들의 진심은 분열과 갈등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 '원 팀(One Team)'이 가진 진정한 힘을 보여주었다.

시대의 위기 속에서 탄생한 두 번의 '도쿄의 기적'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1997년의 축구가 국가 부도의 벼랑 끝에서 국민의 손을 잡아끌었다면, 2026년의 야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시대 속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되찾게 해 주었다.

지금 세계는 전쟁과 경제 불안, 정치적 갈등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희망의 이야기를 찾는다. 스포츠는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농구 감독 존 우든(John Wooden)은 이렇게 말했다. "승리는 결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한국 야구대표팀의 이번 승리가 바로 그렇다.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조건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낸 결과였다.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강했고, 이번에도 기어코 이겨낼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마침내 결전의 땅 미국으로 향하는 야구 대표팀의 서막은, 지금의 팍팍한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국민 모두를 향한 뜨거운 응원가다. 축구에 이어 야구가 재현해 낸 두 번째 도쿄의 기적은, 우리 한민족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증명했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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