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내일 모레면 겨울인데…" 돌아갈 곳 잃은 구룡마을 사람들

  • 이예리 기자
  • 입력: 2026.10.29 00:00 / 수정: 2026.10.29 00:00
화마 덮친 구룡마을, 형체도 알 수 없어
겨울 다가오는데…임시대피소 이후 걱정
전날 화마가 휩쓸고 간 서울 강남구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은 28일 시커먼 잿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불이 시작된 2지구는 검게 그을린 철골과 벽돌, 목재 등 건축 자재와 가구가 뒤엉킨 채 쓰러져 있었다. /이예리 기자
전날 화마가 휩쓸고 간 서울 강남구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은 28일 시커먼 잿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불이 시작된 2지구는 검게 그을린 철골과 벽돌, 목재 등 건축 자재와 가구가 뒤엉킨 채 쓰러져 있었다. /이예리 기자

[더팩트ㅣ이예리 기자] 28일 오후 1시30분께 서울 강남구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에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날 약 13시간에 걸쳐 휩쓸고 지나간 화마에 마을 전체는 시커먼 잿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검게 그을린 집 한 채를 지나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불에 탄 판잣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과 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고, 철제 기둥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검게 탄 목재와 뒤엉켜 있었다. 집들이 연이어 무너지면서 어디까지가 한 집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 있었다. 바닥엔 소화기가 나뒹굴었고, 벽에는 타다 만 실외기만 남아 있었다. 그을린 옷과 신발, 모자 등은 참혹했던 전날 상황을 대변했다.

구룡마을 2지구에 사는 문모(70) 씨는 허망한 표정으로 한동안 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더니 "다 탔다"고 말했다. 문 씨는 "어제 바로 집 앞에서 불이 활활 나 놀랐다"며 "경황이 없어 크로스백 하나만 챙겨 나왔다"고 전했다. 이어 "같이 사는 아들이 어제 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에 나갔는데, 내일 돌아오면 남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40대 김모 씨도 "2지구로 올라가는 길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세탁물도 하나 못 건진 채 잠옷 차림으로 대피했다"며 "모자랑 슬리퍼도 앞에서 방금 사왔다"고 말했다.

강남구청은 개포중과 구룡중 체육관에 이재민 대피소를 마련하고 원하는 경우 호텔로도 이동하도록 했다. 사진은 개포중 대피소. /이예리 기자
강남구청은 개포중과 구룡중 체육관에 이재민 대피소를 마련하고 원하는 경우 호텔로도 이동하도록 했다. 사진은 개포중 대피소. /이예리 기자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 중 일부는 임시대피소로 가지 않고 마을 입구 왼편에 설치된 화재민 급식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파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김치통과 끓고 있는 냄비가 있었다. 10명 남짓한 주민들은 3개 테이블에 나눠 앉아 식사하거나 얘기를 나눴다.

최모(52) 씨는 "운동하고 집에 들어와 씻으려는데 뒤쪽에 연기가 엄청나게 나고 있었다"며 "짐을 싸다가 불이 번질 것 같으니 빨리 나가라는 말을 듣고 필요한 옷가지 몇 벌만 봉지 두 개에 담아 나왔다"고 했다. 이어 "어떤 사람은 손에 잡히는 옷 아무거나 들고 반바지 차림으로 나오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임시대피소는 마을에서 약 360m 떨어진 개포중학교 체육관에 마련됐다. 임시대피소엔 노란색 텐트 28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한 평(약 3.3㎡) 남짓한 텐트 안에는 초록색 매트와 담요, 응급 구호 세트 등만 있을 뿐이었다.

대피소 한켠에는 컵라면 박스와 생수, 과자 등이 쌓여 있었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다녀오는 이들을 제외하곤 텐트 밖을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 씨는 "전날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린 사람이 있어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대피소가 불편하기도 하고, 화장실에 휴지도 충분하지 않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지 들은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날 오후 3시49분께 구룡마을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은 구룡마을 2지구에서 시작됐으며 바람의 영향으로 1, 3지구로 확대됐고 7지구 일부와 구룡산까지 번졌다. /이예리 기자
전날 오후 3시49분께 "구룡마을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은 구룡마을 2지구에서 시작됐으며 바람의 영향으로 1, 3지구로 확대됐고 7지구 일부와 구룡산까지 번졌다. /이예리 기자

이강일(62) 구룡토지주민협의회장은 "불이 하도 많이 나니 '또 나는구나, 여기까지 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어제는 히터를 틀어도 추워 다들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내일 모레면 겨울인데 큰일났다"고 말했다.

강남구청은 개포중과 구룡중 체육관에 이재민 임시대피소를 마련했으며, 원하는 경우 호텔로도 이동하도록 했다. 다만 강남구청은 "대피소는 최장 7일까지 지낼 수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설명했다.

이날 마을 곳곳에서는 주민들 간 크고 작은 충돌도 빚어졌다. 마을에 거주하다 SH(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로부터 보상을 받고 떠난 전 주민 7~8명은 오전 10시30분께 화재민 급식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이주 나갔으면 다시 들어오지 말고 그대로 살라", "왜 나갔는데 여기 다시 오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항의했다. 전 주민들은 결국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무료급식소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 2017년까지 구룡마을에 살았다는 A(77) 씨는 "개발이 어떤 형태로든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갔다"며 "서로 생각이 달라 갈등이 생기는 것 같다. 지금은 SH에서 제공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어제 화재가 궁금해 일찍 와봤다"고 했다.

소방과 경찰, 전기안전공사 등 관계기관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30분께까지 1차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이날 감식에선 조사 구획 설정과 현장 사진 촬영 등이 이뤄졌다. /강남소방
소방과 경찰, 전기안전공사 등 관계기관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30분께까지 1차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이날 감식에선 조사 구획 설정과 현장 사진 촬영 등이 이뤄졌다. /강남소방

반면 구룡마을에 거주 중인 50대 B 씨는 "이사 간 사람들은 떠났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며 "다들 바로 앞 아파트에 살면서 왜 여기까지 찾아오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구룡마을은 1988년을 전후해 개포동 일대 개발로 밀려난 철거민 등이 모여 형성한 판자촌이다. 지난 2016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뒤 SH가 사업시행자를 맡아 재개발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개발 방식과 이주 및 보상 대책 등을 둘러싸고 주민들 간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앞서 전날 오후 3시49분께 구룡마을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은 구룡마을 2지구에서 시작됐으며 바람의 영향으로 1, 3지구로 확대됐고 7지구 일부와 구룡산까지 번졌다. 용수 부족까지 더해지며 진화작업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약 13시간 만인 이날 오전 4시39분께 완진에 성공했다.

이번 불로 구룡마을 7지구에 살던 30대 여성 1명이 왼쪽 발등 부종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주민 39명은 스스로 대피했다. 피해 가구는 91가구 총 127명으로 파악됐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과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30분께까지는 1차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이날 감식에선 조사 구획 설정과 현장 사진 촬영 등이 이뤄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오는 30일 오전 10시 2차 합동감식을 실시할 계획이다.

ye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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