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설상미 기자]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징역 23년을 선고한 법원 판결문에 윤석열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비상계엄 전후 구체적 행적이 상세히 담겼다. 국무회의 정족수 확보, 언론사 단전·단수 근거 검토, 국무위원 부서 시도 등 일련의 행적이 판결문을 통해 적시되면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장관과 박성재 전 법무부장관 재판에서도 판단의 주요 근거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이진관 부장판사)는 지난 21일 내란 중요임무 종사, 내란 우두머리 방조 등의 혐의로 기소된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앞서 조은석 특별검사팀(내란특검)이 구형한 징역 15년보다 더 중형을 내렸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에 대해 내려진 법원의 첫 유죄 판단이다.
재판부는 12·3 비상계엄을 형법상 내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윤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선포로 헌법에 따라 보장되는 의회 및 정당제도를 부인하는 내용의 위헌·위법한 포고령을 발령한 것, 군·경을 동원해 국회 및 선거관리위원회를 점거하고 출입 통제, 압수수색한 것은 형법 제 87조에 정한 내란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같은 내란의 위헌성 정도는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을 경시하고 내란 행위를 함으로써 국민이 가지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신념 자체를 뿌리째 흔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한 전 총리는 실제로 국무회의 심의를 할 의사가 없는데도 헌법과 계엄법에 따른 절차를 거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윤 전 대통령에게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다.
또 한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사정족수를 채우는 데 필요한 국무위원들만 선별적으로 소집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국무조정실을 통해 나머지 국무위원들에게는 소집 통지를 하지 않았다. 대신 비상계엄 선포 지연을 막기 위해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게 직접 연락해 대통령실로 오도록 재촉하는 등, 의사정족수 충족을 위한 국무위원 도착 상황을 점검한 것으로 적시됐다.
◆이상민, 언론사 단전단수 근거 찾았다...새 행적 드러나
또 판결문에는 이 전 장관이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검색해 언론사 단전단수 근거를 찾아봤다는 행적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판결문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12·3계엄 당일 오후 8시 36분경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 전 장관과 박 전 장관,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을 모아 "오늘 밤 10시경 비상계엄을 선포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은 "국회가 각료, 검사 탄핵에 예산까지 삭감해 더 이상 국정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종북세력 때문에 국가기능이 망가질 지경이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이 전 장관은 12·3 계엄 선포 전인 오후 9시 13분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휴대전화로 '헌법'을 검색한 뒤 휴대전화를 들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약 18초 후 대접견실에 나왔고 9시 19분경 정부조직법도 검색했다.
재판부는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언론의 자유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 규정을 찾아 윤석열에게 보고 하고, 봉쇄, 단전․단수 조치 등 업무를 지시할 법률상 근거가 있는지 찾아봈다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또 이 전 장관이 허석곤 전 소방청장에게 "경찰이 특정 언론사 5곳에 투입될 예정인데, 경찰로부터 단전 단수 요청이 오면 소방청에서 조치를 해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외에도 이 전 장관이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에게 전화를 건 사실도 적시됐다.
재판부는 "이 전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윤석열, 김용현으로부터 특정 언론사 단전․단수 조치 지시와 그 지시사항이 기재된 문건을 교부받았음을 뒷받침하고, 그 지시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관련된 사람들에게 전화했다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계엄법상 윤 전 대통령의 불법한 계엄 선포를 방조하고,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전달하는 등 내란을 공모한 혐의를 받는다.
다만 이 전 장관은 그간 비상계엄 당시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받거나 내린 적이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해왔다. 이 전 장관 선고는 내달 12일 예정돼있다. 특검은 이 전 장관에 한 전 총리와 같이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박성재 "참석자 서명 받아야 한다"...최상목, 조태열 부서 반대
마찬가지로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전 장관에 불리한 정황도 드러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 전 장관은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18분 윤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마치고 계엄을 선포하러 나가자, 상의 안주머니에서 문건을 꺼내 국무위원 참석자 명단을 적었다.
또 박 전 장관은 그로부터 약 20분 뒤인 오후 10시 39분쯤 이 전 장관에게 "참석자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전 장관이 강의구 전 대통령실 부속실장에게 이를 요청하자는 취지로 말하자, 박 전 장관은 강 전 실장을 불러 "누가 참석했는지 남겨야 한다"는 취지로 직접 말한 것으로 적시됐다.
박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직후 법무부 출입국본부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리고 합동수사본부로의 검사 파견 검토, 교정시설 수용 공간 확보 지시 등을 내려 내란 행위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 박 전 장관은 이를 계엄 선포에 따른 형식적인 지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전 장관의 재판은 시작 단계로, 지난 19일 공판준비절차를 거쳐 오는 26일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넌 예스맨이니까"…반대 의사 명확히 한 최상목·조태열
재판부는 한 전 총리의 책임을 단순한 가담 행위가 아니라, 국무위원으로서 요구되는 역할을 이행하지 않은 데서 찾았다. 비상계엄 선포를 저지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도 막지 않았고, 오히려 국무회의 성립을 도우려 했다는 점이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로 제시됐다.
재판부는 특히 한 전 총리가 "오히려 윤석열이 국무회의 의사정족수를 갖출 수 있는 일부 국무위원만을 선별해 소집하는 데 관여했다"라며 "부작위로 인한 법익침해가 작위에 의한 법익침해와 동등한 형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범죄의 실행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재판부가 부작위에도 형사책임을 인정한 만큼, 계엄 선포 과정에서 각 국무위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향후 책임 판단의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와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의 행적이 한 전 총리 등 다른 국무위원들과 대비되는 모습도 드러난다.
판결문에 따르면 한 전 총리는 비상계엄 해제 국무회의 직후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앞선 계엄 선포 과정에서 국무회의 심의에 하자가 있어 해제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논리를 내세우며 부서를 받으려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 전 부총리와 조 전 장관의 반대로 국무위원 부서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최 전 총리는 "(부서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고, 조 전 장관 역시 "반대한다"고 말했다.
당시 국무회의에는 총 11명의 국무위원이 참석했지만, 최 전 부총리와 조 전 장관이 계엄을 뚜렷하게 반대했다. 최 전 부총리는 한 전 총리를 향해 "왜 반대를 하지 않았느냐", "50년 공직생활을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그러느냐", "지금 외환시장이 돌아가고 있는데 어떡할 거냐"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또 이 전 장관을 향해 "예스맨이어서 '노'라고 하지 못했다"고 크게 분노한 대목도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