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 장학생' '문학 판사' '평균인의 삶' 문형배의 라스트신
  • 송다영 기자
  • 입력: 2025.04.18 00:00 / 수정: 2025.04.18 00:00
독서로 무지·무경험·무소신 극복
'어른 김장하' 가르침 '평균인의 삶' 소신 지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8일 6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더팩트 DB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8일 6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더팩트 DB

[더팩트ㅣ송다영 기자]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지난 4일 8대0 만장일치로 결정된 헌재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목소리로 낭독됐다.

문 권한대행은 1965년생 경남 하동 출생으로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2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하며 재판관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내는 등 경남 지역에서만 근무한 '향판'(지역법관) 출신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헌법재판관이 된 그는 판사모임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내 진보적 셩향으로 분류됐으며 '소신이 뚜렷한 판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 결정 이후 문 권한대행의 걸어온 삶의 궤적들도 국민들 사이 회자됐다.

◆ 소문난 '독서 판사'…책으로 배운 세상

문 권한대행은 소문난 '탐독가'다. 윤 전 대통령 파면 이후에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문 권한대행이 독후감을 남긴 개인 블로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 문 권한대행의 창원지법 부장판사 재직시절 일화가 일례다. 그는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방화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법정에서 "'자살'을 열 번 외쳐보라"고 한 뒤, "(피고인이 열 번 외친 '자살' 소리는)우리 귀에는 '살자'로 들린다.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문 권한대행은 피고인에게 이 말과 함께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하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문 권한대행은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거나, 책 구절 중 일부분을 피고인에게 낭독해주기도 했다.

2019년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재직 당시 그는 '문학 속 재판'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그 자리에서 자신은 '3무(무지·무경험·무소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가까이 했다고 밝혔다.

문 권한대행은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부활> 등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재판에 대해 얘기했다. 문 권한대행은 "<죄와 벌>에서 주인공은 강도살인죄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구)형법에는 강도살인죄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하게 되어 있고, 자수하면 감경 조항이 있어, 결국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았더라도 징역 8년 선고가 가능하다. 독자로서 도스토옙스키의 양형 감각에 놀란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속죄와 인간회복'이라는 소설 속 메시지는 문 권한대행의 실제 판결로도 연결됐다. 그는 "몇 년 전 공무원 노조위원장이 불법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됐다. 1심 판사로서 해고 무효를 선고하며 '징계사유가 맞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해고하고 나면 더는 반성할 기회가 없다. 공무원으로 남겨둬야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고 썼다"라며 "제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썼겠나? 그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죄는 스스로 뉘우치는 것이지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평균인의 삶' 그리고 '어른 김장하'

6년 전 문 권한대행이 자신의 청문회에서 '어른 김장하'의 장학생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얘기하며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털어놓은 것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문 권한대행은 당시 신고 재산이 6억 7545만 원으로, 본인 재산은 약 4억 원에 못 미쳤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헌법재판관들 재산이 평균 20억원쯤 되는데, 후보자 재산은 6억7545만원"이라며 "헌법재판관이 되면 가장 적은 재산을 가진 헌법재판관이 되실 텐데 27년간 법관을 했는데, 너무 과소한 거 아니냐.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고 물었다.

이에 문 권한대행은 "제가 결혼할 때 다짐한 게 있다.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최근 통계를 봤는데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재산이 한 3억원 남짓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제 재산은 한 4억 조금 못 된다"고 답했다.

문 권한대행이 2019년 인사청문회 당시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문 권한대행이 2019년 인사청문회 당시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이어 문 권한대행은 "평균 재산을 좀 넘어선 것 같아서 제가 좀 반성하고 있다"며 공직 생활이 끝나도 영리를 위한 변호사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문 권한대행의 답변을 들은 백 의원은 "청문회를 하는 저희가 오히려 좀 죄송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문 권한대행의 삶의 철학은 김장하 선생의 가르침이 바탕이 됐다.

청문회에서 그는 "김장하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해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줬다"며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선생은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 했고, 그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의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1000명이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고, 1983년 진주에 명신 고등학교를 세우고 국가에 헌납했다. 그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었으며, '친일인명사전' 제작도 도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선행을 베풀어 온 그는 2023년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공개되며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 권한대행은 다큐멘터리에 김장하 선생 장학생으로 출연했다. 어려운 환경 속 학업을 이어 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문 권한대행은 청문회 당시 밝힌 김 선생과의 에피소드를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 "사법부 위기? 재판 잘하면 돼"…그리고 6년 뒤

문 권한대행은 2019년 문학 특강 자리에서 "사법부가 위기지만 탈출 방법은 있다. 재판 잘하면 된다"며 "억울한 사람이 없으면 되고, 벌을 줄 사람한테는 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여론이 높아도 벌 줄 사람은 벌을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6년 뒤,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이 된 그는 퇴임을 2주 남기고 대통령 파면을 선고했다.

문 권한대행은 퇴임 하루 전인 17일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열린 '법률가의 길' 특강에서 탄핵결정의 기준이 '관용과 자제'였다고 언급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야당의) 탄핵소추는 그 선을 넘지 않았고, 비상계엄은 넘었다는 것이 헌재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문 권한대행은 "탄핵소추는 야당 권한이다, 문제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비상 계엄은 대통령 권한 아닌가. 거기서 답을 찾을 수는 없다"라며 "관용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자제는 힘 있는 사람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관용과 자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 권한대행은 이어 "탄핵 선고에서 모순이 있지 않냐고 말하는데 저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가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인정되는 절제가 야당에도 인정돼야 그것이 통합"이라고 강조했다.

탄핵 선고가 늦어진 데 대해서는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나"라며 "그 통합을 우리가 좀 호소해보자. 그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직무대행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을 선고 한 뒤 김형두 헌법재판관과 함께 법정을 나가고 있다. /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직무대행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을 선고 한 뒤 김형두 헌법재판관과 함께 법정을 나가고 있다. /뉴시스

문 권한대행은 주문 낭독 뒤 일어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김형두 재판관의 팔과 등을 토닥이며 심판정을 나갔다. 김 재판관은 문 권한대행이 퇴임하면 권한대행 자리를 넘겨받는다.

문 권한대행은 18일, 6년 간의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manyze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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