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시작된 리메이크 열풍이 올해 광풍이 돼 불고 있다. 주로 솔로 가수들에 한정됐던 리메이크는 이제 밴드와 아이돌그룹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선택을 받고 그 대상도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폭넓다. 신곡인 듯 신곡 아닌 신곡 같은 리메이크. 업계 관계자들과 가수의 얘기를 듣고 각광받는 이유를 짚어 봤다.<편집자 주>
[더팩트 | 정병근 기자] 리메이크(remake)는 말 그대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리메이크가 이뤄지고 있지만 가장 활발한 건 단연 음악 시장이다. 과거의 히트곡에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색을 입히기도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을 발굴하기도 한다.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기존의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한다는 면에서 어쩌면 손쉬운 선택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한줄기 빛이다. 여기에 삶과 추억이 녹아들었을 때 리메이크는 '다시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최근 몇년 사이 리메이크 곡 중 가장 히트한 곡은 2005년작인 필의 동명의 곡을 김민석(멜로망스)이 다시 부른 '취중고백'(2021)이다. 써클차트 음원 연간차트에서 2022년 3위, 2023년 30위, 2024년 57위이니 그야말로 메가 히트다. 이 곡은 '새로 풀고 엮어 다시 만나다'란 슬로건을 내세운 리본(RE:BORN)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했다. 2021년부터 경서와 MJ의 '술 한잔 해요' 김나영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먼데이키즈 '흰눈' 등 여러 곡이 나와 사랑을 받았고 '취중고백'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경서의 '밤하늘의 별을'(2020)(원곡 양정승 2010년)이 2021년 연간차트 9위에 올랐고 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유가 2014년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에 수록된 '너의 의미'(feat. 김창완)(산울림 1984년)가 그해 연간차트 5위를 차지하는 등 리메이크 곡들의 성과가 있었다.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이미 2012년 시작해 긱스와 소유의 'Officially Missing You, Too(오피셜리 미싱 유, 투)'를 탄생시킨, 숨어 있는 명곡을 소개하는 리코드(re;code)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러다 '취중고백'의 메가 히트 후 리메이크 곡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지난해 임재현의 '비의 랩소디'(최재훈 2000년)와 이창섭의 '천상연'(캔 2000년)이 연간차트에서 각각 8위와 14위에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2월까지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중식이 2020년)이 추운 날씨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1월 공개된 조째즈의 '모르시나요'(prod. 로코베리)'(다비치 2013)도 입소문을 타면서 2월 들어 폭발적인 인기다.
리메이크 곡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데는 연이은 히트곡의 탄생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보다 앞서 음악 산업 내 구조적인 변화가 촉발제다. 수년 전부터 비욘드뮤직, 뮤직카우, RBW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음악 IP를 확보하는 움직임이 공격적으로 이뤄졌고 이렇게 보유한 IP를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리메이크다. 리메이크가 이뤄지면 원곡도 동반 상승하는 효과가 있고 여기에 메가 히트곡까지 터지니까 너도나도 뛰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음악 업계에서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커지면서 규모가 작은 기획사들이 아이돌 그룹 등 대형 가수를 제작해 성공시킨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상대적으로 제작비까지 절감할 수 있는 리메이크 시장이 매력적인 대체제로 떠올랐다. 완성된 곡들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렇다 보니 리메이크 열풍을 두고 업계 한 관계자 A 씨는 "구조적으로 봤을 땐 리메이크 열풍은 음악 시장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리메이크 열풍이 제작자들에겐 '빛'이라고 했다. 그는 "뉴트로 현상과 잘 맞물려서 리메이크가 붐업이 됐는데 그거라도 활성화되는 게 제작자들에게는 한줄기 빛이다. 아이돌 아니면 트로트인 이 시장에서 우리 같은 영세한 제작자들에겐 희망이 생긴 거고 리메이크를 안 할 이유가 없어졌다. 요즘 작곡가들에게 리메이크 승인 받는다고 아주 난리"라고 말했다.
실제로 리메이크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빠른 템포의 레게 음악인 김건모의 '핑계'를 성별이 다른 권진아가 새롭게 부르면서 소울풀한 발라드로 재탄생되기도 하고, '나는 반딧불'처럼 원곡의 감성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청춘의 감성으로 히트곡을 재해석하는 '러브썸 프로젝트'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전율과 기적 같은 순간을 선물하며 세대 간의 공감을 이룩하자는 '데자뷰 프로젝트', M세대의 추억과 Z세대의 트렌드를 결합한 'MZ the X Project' 등 리메이크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MZ the X Project'와 '러브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나상천 꿈의엔진 대표는 "리메이크라는 것이 태생이 추억과 향수를 갖고 있다는 게 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며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하기도 하지만 이미 그 시대에 대중적으로 검증을 받았던 곡이니까 새로운 시대에서도 좋아할 확률이 높다. 리메이크가 잘 된다고 계속 한다는 생각은 없다. 명분과 목적성이 정확히 있을 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리메이크가 이젠 발라드 힙합 이런 것처럼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현 상황을 짚었다.
이어 "'또 리메이크야?'라는 말도 있을 수 있지만 좋은 노래를 색다르게 소비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일단 그 곡에 잘 어울리는 가수를 매칭하는 것이고 보컬과 악기 배열, 보컬 톤과 느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연구한다. 노래를 새롭게 해석하고 보컬에 노래가 담겼을 때 어떻게 표현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잘 표현됐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런 게 제작자로선 리메이크를 대하는 이유이고 보람이자 목표다"라고 부연했다.
또 다른 제작자 B 씨는 "아예 원곡과 다르게 가서 비교대상이 안 되게 하거나 원곡을 뛰어넘는 가창과 편곡을 하는 게 좋은 거 같다. 그런데 원곡을 뛰어넘는 게 어렵긴 하다. 새로운 가창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렇게 있으면 하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원곡에 스며들 듯이 하는 것도 방법이다. 무리하게 뛰어넘으려고 하면 잘 안 되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비치의 '모르시나요'를 조째즈가 아니라 어떤 여가수가 원곡을 뛰어넘자고 불렀으면 잘 안 됐을 것"이라고 생각을 전했다.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원곡자를 꼽으라면 유해준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주요 곡만 해도 '천년의 사랑' '약속' '잘가요' '천상연' '미치게 그리워서' 등 수두룩하다. 그 역시 리메이크를 "매우 멋진 일"이라며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유해준은 "리메이크는 무한의 방향으로 재창조가 될 수 있고 창작의 한 장르로써 잘 만든 리메이크는 매우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며 "음악 팬들의 듣는 취향이 다양해진 거 같다. 특히 감각적인 음악만 듣던 젊은 음악 팬들이 다양한 장르에 귀를 귀울이는것 같고 트로트를 좋아하는 중장년층도 듣는 취향이 세련돼지면서 감상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음악의 창작 방향도 많이 바뀌었고 주요 창작자들이 미처 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지점의 감성을 리메이크 장르가 채워주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리메이크는 다시 부르는 가수에게도 원곡자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주기도 한다. '나는 반딧불'을 부른 황가람은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작사 작곡해 세상에 공개된 곡이 100곡 이상이다. 주인이 따로 있는 리메이크 곡이라면 애착이 덜 생길 법도 하지만 그는 "곡을 만나고 나오기까지의 삶과 추억이 한 데 어우러져 한덩어리가 돼 더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런 황가람에게 리메이크는 "각각의 가치를 부여하고 각자의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어 "중식이 형이 '형식은 리메이크지만 우리의 노래'라고 얘기해줬다"고 전했다.
'나는 반딧불'의 원곡자인 밴드 중식이의 정중식은 "'나는 반딧불'은 어렸을 때부터 록스타를 꿈꾸면서 열심히 해오다가 서른 중반 즈음에 더이상 할 수 없어서 포기한 친구들의 마음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꿈을 이루지 못한 우리들의 노래"라며 "가람이에게도 '이건 우리의 노래'라고 얘기했다. 아직까지 꿈을 이루지 못한 우리들의 노래라는 마음이었다. 가람이도 저도 그런 시기를 지나왔는데 힘이 합쳐져서 뭔가를 풀어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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