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보다 강한 원팀의 힘, 서울의 부활은 K리그 흥행 기폭제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수많은 팬의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짊어지는 프로축구 감독에게 3년 안에 우승하겠다는 약속은 자신의 지도자 생명을 건 도전이나 다름없다.
2024년 1월 FC서울의 지휘봉을 잡은 김기동 감독은 "찬란했던 옛 영광을 되찾겠다. 3년 안에 우승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서울의 현실을 생각하면 호기로운 출사표로 들릴 만했다. 10년 가까이 우승하지 못한 명문 구단, 한때 2부 리그 강등의 벼랑 끝까지 몰렸던 팀이었다.
그로부터 2년 9개월. 김기동은 자신의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FC서울은 2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강원FC와의 '하나은행 K리그1 2026' 33라운드에서 1-1로 비기며 승점 67점(20승 7무 6패)을 확보했다. 2위 울산 HD와의 승점 차는 16점. 파이널 라운드 5경기를 남겨두고 우승을 확정했다. 2016년 이후 10년 만이자 구단 통산 7번째 정상이다.
이날 상암벌을 찾은 3만22명의 관중에게 우승은 단순한 트로피 하나의 의미가 아니었다. 10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자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김 감독은 우승 직후 "팬들과 약속을 지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화려한 우승 소감보다 이 짧은 한마디가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 강등의 굴욕에서 정상까지…명문은 어떻게 다시 태어났나
FC서울은 한국 프로축구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다. 하지만 명문이라는 이름이 언제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2016년 우승 이후 서울은 긴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8년에는 리그 11위로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치렀다. 우승을 다투던 팀이 2부 리그 강등을 걱정하는 처지로 추락했다. 명문 구단의 가장 큰 적은 상대 팀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자기만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시기였다.
2024년 김기동 감독이 부임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첫해 4위로 반등했지만 2025년에는 6위로 밀려났다. 기대했던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비판과 야유도 쏟아졌다. 하지만 김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자신의 축구를 팀에 뿌리내리는 데 집중했다. 선수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공격과 수비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가 부임 3년 차인 2026년의 우승이다. 33경기에서 20승을 거두고, 2위와 16점 차를 벌린 압도적인 성과다.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교훈이 떠오른다. 어리석어 보일 만큼 한결같은 노력이 결국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김기동의 3년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마법이 아니라 축적된 노력의 결과였다.

◆ 스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원팀'이라는 가장 강한 무기
이번 우승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서울이 화려한 스타의 이름값에 의존하지 않고 정상에 섰다는 사실이다. 기성용과 제시 린가드가 떠났고, 시즌 도중 송민규까지 해외로 진출했다. 인기와 화제성을 이끌던 선수들의 이탈은 분명 구단에 부담이었다.
하지만 김기동 감독은 선수 개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조직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공격수 클리말라와 안데르손, 정승원 등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김진수를 비롯한 수비진과 골키퍼 구성윤이 공수의 균형을 뒷받침했다.
우승을 확정한 강원전은 이런 서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전반 추가시간 구성윤이 상대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후반 시작과 함께 김 감독은 문선민 등을 투입해 변화를 줬다. 문선민은 후반 13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감독의 승부수에 화답했다.
골을 넣은 공격수만 영웅이 아니었다. 실점을 막은 골키퍼, 경기를 바꾼 교체 선수, 묵묵히 역할을 수행한 동료들이 함께 만든 우승이었다. 물론 기성용이나 린가드가 떠났기 때문에 우승했다는 식의 단순한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김 감독 자신도 기성용의 존재 여부와 우승을 직접 연결하는 시각에 선을 그었다.
핵심은 스타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선수가 들어와도 팀의 원칙과 역할이 유지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느냐'에 있다. 미국 농구 명장 필 잭슨의 리더십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개인의 재능을 집단의 조화 속에서 극대화하는 지도 철학으로 유명했다. 김기동 축구 역시 선수의 개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안에서 각자의 능력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김 감독은 우승 기자회견에서 "모든 비난은 목표를 이뤘을 때 서사가 된다. 감독은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것이 '김기동 매직'의 진짜 비밀이다. 비난을 변명으로 피하지 않고 결과로 답하는 책임감. 그것은 전술 못지않게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이다.

◆ 수도 서울의 우승…K리그 흥행 지도를 바꿀 기회
FC서울의 우승은 구단 하나의 경사를 넘어 K리그 전체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와 경제, 문화와 미디어가 집중된 도시다. 이런 서울을 연고로 하는 명문 구단이 우승 경쟁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프로축구의 대중적 관심과 시장성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다.
서울은 이미 올 시즌 평균 관중 2만 2000명을 넘어서는 흥행 기반을 갖췄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지켜온 팬들의 충성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다. 여기에 10년 만의 우승이라는 강력한 이야기가 더해졌다. 패배와 좌절, 재건과 정상 탈환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새로운 팬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가장 강력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유럽의 주요 축구 리그에서도 수도나 대도시의 인기 구단은 흥행과 상업적 성장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잉글랜드 런던의 아스널과 첼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프랑스 수도 파리의 파리생제르맹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수도 연고 구단의 성공이 리그 전체의 흥행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부활이 전북, 울산, 포항 등 기존 명문과 지역 연고 구단들의 경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지역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낼 때 효과는 더 커진다.
서울이 강해질수록 서울을 꺾으려는 상대 팀의 도전도 커진다. 경쟁의 수준이 올라가면 경기의 가치가 높아지고, 더 많은 팬과 스폰서, 미디어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선순환이다.
GS그룹 허태수 회장이 강조해 온 '팬 퍼스트' 철학도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좋은 경기력과 편리한 관람 환경, 매력적인 상품과 지속적인 팬서비스가 결합해야 일시적인 우승 특수를 장기적인 성장으로 연결할 수 있다.

◆ 우승은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
김기동 감독은 우승 헹가래를 받은 소감을 묻자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계속 있고 싶더라"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게 끝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다음 목표가 리그 연속 우승이 될 수도 있고, 아시아 무대 정상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정상에 머무는 것이다. 10년 만에 되찾은 영광이 또다시 10년의 기다림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우승을 가능하게 한 철학과 시스템을 구단의 지속 가능한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김 감독은 지난 3년 동안 축구에만 몰두했다고 했다. 아내가 자신의 몫으로 생각했던 시간까지 양보했고, 감독 자신도 골프를 포기하며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그 헌신에는 가족의 희생과 팬들의 기다림이 함께 담겨 있다.
누군가의 성공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 김기동의 머리 위로 쏟아진 꽃가루에는 가족의 인내, 선수들의 땀, 10년 동안 서울을 떠나지 않은 팬들의 눈물이 함께 섞여 있다. 10년의 암흑기를 끝낸 FC서울의 일곱 번째 별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김기동은 3년 안에 우승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 FC서울에 남은 더 큰 약속은 다시는 명문의 자존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 약속이 지켜진다면 2026년의 우승은 단순한 왕좌 탈환이 아니라 FC서울의 새로운 황금기, 나아가 K리그의 또 다른 도약을 알리는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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