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투혼’ 이란도 비겼다...아시아 6개국 ‘무패 행진’ 톺아보기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06.16 13:54 / 수정: 2026.06.16 14:14
브라질도 스페인도 멈칫…빛나는 아시아(AFC)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질주 배경
출퇴근 투혼을 발휘한 이란의 모하마드 모헤비(맨 왼쪽)가 16일 뉴질랜드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G조 1차전 후반 19분 2-2 헤더 동점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출퇴근 투혼'을 발휘한 이란의 모하마드 모헤비(맨 왼쪽)가 16일 뉴질랜드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G조 1차전 후반 19분 2-2 헤더 동점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공은 둥글고, 세계 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지구촌 최대의 축구 축제인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초반, 세계 축구계의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삼바 축구'의 자존심 브라질이 모로코와 비기고, 무적함대 스페인이 본선 첫 출전국인 카보베르데와 득점 없이 비기는 등 전통의 강호들이 줄줄이 덜미를 잡히며 무승부의 늪에 빠졌다. 이 거대한 이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눈부신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 국가들이다.

중동의 모래폭풍부터 동아시아의 투혼까지, 이번 대회에 나선 아시아 팀들은 단 한 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는 ‘무패 행진’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아시아 축구는 이제 더 이상 유럽과 남미의 들러리가 아니다. 철저한 준비와 전술적 영리함으로 세계적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2일(한국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체코와의 2026 북중미월드컵 A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황인범(페예노르트)과 오현규(베식타시)의 연속 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했다. 사진은 기뻐하는 오현규와 황인범. /과달라하라=AP.뉴시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2일(한국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체코와의 2026 북중미월드컵 A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황인범(페예노르트)과 오현규(베식타시)의 연속 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했다. 사진은 기뻐하는 오현규와 황인범. /과달라하라=AP.뉴시스

그 선봉에는 역시 대한민국이 있었다. AFC(아시아축구연맹)의 첫 대표주자로 나선 한국 대표팀은 까다로운 복병 체코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기분 좋은 첫 단추를 끼웠다. 이어 호주가 튀르키예를 2-0으로 완파하며 기세를 올렸고, 카타르는 스위스와 1-1, 일본은 네덜란드와 2-2, 사우디아라비아는 남미의 복병 우루과이와 1-1로 비기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통적으로 강한 유럽과 남미 축구팀들과 맞서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인 결과다.

아시아 무패 행진의 기세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간 팀은 16일 오전(한국 시간) 뉴질랜드와 2-2로 비긴 이란이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이란이 처한 환경은 설상가상(雪上加霜) 그 자체였다. 미국과 전쟁 속에서 미국 비자 발급 거부 파동으로 인해 이란은 온전한 행정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단장과 홍보 담당자 등 스태프 15명의 비자가 거부되면서, 선수단은 미국이 아닌 멕시코 티후아나에 베이스캠프를 차려야 했다.

일본의 오가와 고키(왼쪽)와 도미야스 다케히로가 15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인근 알링턴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F조 네덜란드전에서 팀의 두 번째 골이 나온 뒤 기뻐하고 있다. /알링턴=AP·뉴시스
일본의 오가와 고키(왼쪽)와 도미야스 다케히로가 15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인근 알링턴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F조 네덜란드전에서 팀의 두 번째 골이 나온 뒤 기뻐하고 있다. /알링턴=AP·뉴시스

경기가 열릴 때만 미국으로 이동했다가 경기가 끝나면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야 하는, 전대미문의 '원정 출퇴근'을 감행하는 처지다. 시차와 물리적 이동 거리에 따른 피로 누적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이란은 뉴질랜드의 엘리자 저스트에게 멀티골을 내주면서도 라민 레자이안과 모하마드 모헤비의 연속골로 끝내 2-2 무승부를 일궈냈다. 악조건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아시아 축구의 강인한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준 명승부였다.

"위대한 승리는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서 태어난다"는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이란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은 단순한 승점 1점을 넘어 대회 전체에 커다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과거 월드컵에서 아시아 축구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수비에 치중하다 역습 한 번을 노리는 소극적인 전술, 혹은 체력과 체격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반 무너지는 시나리오가 관습처럼 되풀이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북중미 대회에서 아시아 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현대 축구의 흐름인 강한 전방 압박과 빠른 공수 전환을 완벽히 이식했고, 강팀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의 경기를 펼치고 있다.

아시아 축구는 그동안 세계 무대에서 맛본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자양분 삼아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이뤄냈다.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선수들의 양적·질적 성장은 전체 대표팀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고, 이제는 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무대에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 겨우 조별리그 1차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 앞으로 남은 일정은 더욱 험난할 것이다. 당장 한국은 조별리그 선두 다툼의 분수령이 될 멕시코와 2차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강호들이 대회 초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반면, 끈끈한 조직력과 투지로 똘똘 뭉친 아시아의 상승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조짐이다.

지구 반대편 북중미 벌판에서 들려오는 아시아 축구의 승전보는 단순한 이변이 아니라, 세계 축구 권력의 축이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서막이다. 전통의 관습을 넘어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아시아 축구의 위대한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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