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구'를 만난 정치 시사 토론
'정치 얘기하지 말자고?'...나라를 걱정하자는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대로에서 열린 가운데 많은 시민이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국회=박헌우 기자 |
[더팩트 | 황덕준 재미 언론인] 도대체 어느 혹성에서 왔을까 싶은 대통령이란 작자의 비상계엄과 해제, 그에 따른 탄핵정국 등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동포사회의 걱정도 이만저만 크지가 않다. 미국 국적을 가진 시민권자이든, 한국 여권으로 드나드는 영주권자이든 모국의 현재와 미래를 놓고 불안감을 동반한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경험하는 중이다.
지난 10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내놓은 미국 심리학회의 조사결과는 미국 성인의 77%가 국가의 미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알려줬다. 국가지도자를 선택하는 중차대한 이벤트가 닥치다 보니 국가의 앞날이 걱정거리의 주요 원인(Major Source of Anxiety)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통치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희망보다 우려하는 시민이 더 많다는 미국의 현실은 딱하다. 그렇지만 무슨 말로도 납득이 안되는 몰상식한 내란적 사태에 처한 한국과 한국인들에 비하겠는가.
LA동포 사회의 연말 모임마다 대화의 주제는 통일돼 버렸다. 예전 같으면 "이 자리에서 정치 얘기하지 말자"고 손사래를 쳤을 터다. 이젠 180도 달라졌다. 한국의 현 시국과 정치, 시사 문제가 남도의 밥상처럼 식탁에 넘치도록 술 안주로 깔린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윤석열을 성토하고 '국민의 힘'이란 이름의 여당을 욕한다. 만나는 사람끼리 의견이 이토록 같았던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다. 논쟁하고 토론할 여지가 없다 보니 금기시되던 화제가 해방구를 만난 듯하다.
중장년과 노년층이 섞여 있는 동창회의 소셜미디어 단체대화방에서도 한국 상황에 대한 의견이 버젓이 올라온다. 대화방을 나가버리면 성향이 추정될까 신경쓰이는지 탈퇴하는 회원도 별로 없다. '그런 얘기는 따로 만나서 합시다' 같은 문자가 등장, 반발이 없는 건 아니지만 꽤 점잖아졌다.
그동안 정치나 시사를 대화의 주제와 소재로 삼기를 꺼렸던 것은 십중팔구 반대의견에 부딪히는 탓일 게다. 아무리 성숙한 토론문화가 있다해도 어디서건 논쟁은 감정싸움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명절 때마다 '가족 친지들과 정치 얘기 삼가기' '명절 밥상에서 토론 잘하는 법' 따위의 기사가 매체의 생활섹션에 단골메뉴로 등장하지 않던가.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신과의사들이 모여 있는 미국 정신의학회가 대선을 6주 가량 남겨둔 9월 20일부터 사흘 동안 성인 2,2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결과 3명 중 1명(31%)은 선거 시즌에 가족들과 격렬한 정치적 토론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미국공공방송 NPR이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정치적 양극화로 가족끼리 분열되는 문제가 미국 역사상 유례 없이 심각하다"고 지난 9월 15일자에서 지적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친형과 8년 동안 말 한마디 안하고 지낸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별다른 구설없이 높은 인기를 구가해온 가수 임영웅의 '뭐요' 논란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반려견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다가 한 네티즌이 "이 시국에 뭐하냐"고 메시지를 보내자 "뭐요" 라고 답한데서 비롯된 구설수다. "제가 정치인인가요, 목소리를 왜 내요"라는 추가 답변까지 등장하자 그때껏 손가락질 받을 일 없이 깔끔하게 톱스타 자리를 누려온 임영웅에게 "시민적 기초 소양이 부족하다"느니 "한국민의 자격이 없다"라는 험악한 소리가 쏟아졌다. 한 네티즌이 짜깁기한 문자로 벌인 일종의 가짜뉴스에 임영웅이 피해를 봤다는 의혹도 남아 있지만 연예인의 정치적 발언에 관한 찬반양론의 논쟁으로 불똥이 튀는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연예인이든 누구든 자신의 견해를 타인의 강요에 의해 밝힐 일은 아니다. 민주사회에서 사회적 국가적 쟁점에 대해 의견을 갖고 있다면 당당히 공개하든 혼자 마음에 품고 있든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다. 백만 시민이 거리에 나왔는데 당신은 왜 집에 있느냐고 밀어붙이면 그거야말로 반민주적인 폭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79년 12·12쿠데타를 다룬 1천만 관객의 영화 '서울의 봄' 출연 배우들인 황정민, 정우성, 이상민 등이 비상계엄 시국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는 감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침묵이 곧 탄핵반대이거나 윤석열 지지를 뜻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 등 예능의 톱3는 왜 하나같이 조용한가라고 의심의 눈길을 쏘아댈 것까지야 없다는 거다.
대중적 영향력이 워낙 막대한 만큼 그들이 목소리를 내면 울림 또한 작지 않을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으니 내 편이 아니구나라고 예단할 일인가.
요즘 같으면 차제에 여기저기서 정치적 사회적 쟁점에 대해 거침없고 거리낌없이 논쟁하고 토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정치 얘기가 왜 금기시되어야 하는가를 되짚어보면 앞서 말했 듯 건전한 토론과 합의보다 치졸한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게 두려운 탓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현재 진행형인 한국의 상황은 단순한 정치적 이슈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다. 누구랄 것 없이 모두에게 희열을 줄 수도, 비극적인 상처를 낼 수도 있는 총체적인 난국이다. 정상회복이냐, 파멸이냐의 기로다. 정치 얘기가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어찌 입 다물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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