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 선포는 태평양 건너 미국 동포들의 새벽잠을 깨웠다. 3일 낮 LA총영사관앞에서 계엄 철폐 시위를 하려다 계엄 해제로 '윤석열 하야' 시위를 하는 동포들./LA=황덕준 언론인 |
[더팩트 | 황덕준 재미 언론인] 미국에 사는 동포들은 새벽시간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민감하다. 시차를 감안할 때 십중팔구 한국에서 걸려온 게 대부분이다. 고국에 노부모가 계시면 불길한 생각부터 하게 마련이다.(필자는 두분의 별세 소식을 모두 새벽 전화로 들었다)
로스앤젤레스(LA) 시간으로 12월 3일 새벽에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맡 휴대폰에서 SNS 알림소리가 잠을 깨웠다. 대학 동창들끼리 만들어놓은 채팅방에서 한 친구가 '계엄선포' 라고 네글자를 적어 올렸다. 설마하면서도 후다닥 24시간 뉴스채널을 클릭했다.
맙소사!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는 라이브 방송이 잠이 덜 깬 두눈을 번쩍 뜨게 했다. 새벽 5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스무살 까까머리로 군에 있을 때 10·26과 12·12를 겪은 터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거쳐오며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미국시간으로 아침 나절에 CNN 등 온갖 매체에서 톱뉴스로 쏟아낸 계엄관련 소식은 한국정치에 무관심했던 2,3세 한인동포들에게도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LA 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동포들./LA=황덕준 언론인 |
IMF 구제금융 같은 국가부도 위기까지 빠지면서도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발전한 조국의 저력을 긍지 삼아 남의 나라에 터 잡을 때도 어깨에 힘주고 턱을 치켜들 수 있었다. 머리숱은 듬성해지고 귀밑머리는 희끗해졌지만 케이팝이니, 케이푸드니 하며 무엇이든 케이(K)만 붙이면 자부심과 자존감이 높아지던 참이다.
그런 21세기의 한복판에서 비상계엄이라니…. 도무지 비현실적이었다. 몇달 전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계엄령 발동을 경계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말이 안 되는 가짜뉴스 같은 소리를 한다 싶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저리도 물정 모르는 소리나 지껄이니 정쟁이나 한다는 핀잔이나 듣는 게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도 안되고, 물정 모르는 소리가 눈앞에서 실제상황이 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8년전 박근혜 탄핵 당시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 서 있을 때는 수십만 군중이 자랑스러워 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비상계엄' 선포를 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 /국회=박헌우 기자 |
비상계엄은 다르다. 일단 집회 시위 언론의 자유가 봉쇄되지 않는가. 계엄에 항의하며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기에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장애가 많아 상상하기가 끔찍했다. 계엄군과 '5·18 광주'가 연상되니 말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평소 술친구로 지내던 '좌파' 개신교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LA 한인사회 진보단체들의 동향부터 살피고 싶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에 아직 모르나 싶었지만 그는 냅다 "조직을 만들어야지"라고 쏘아붙이듯 응답한다.
낮 12시에 총영사관 앞에서 집회를 가질 거라고도 한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다. 계엄 치하에 한국에서 집회가 어려울테니 미국 동포사회에서라도 날마다 항의시위를 해야할 것 아니냐고 목에 힘을 준다.
출근길 눈이 마주치는 흑인과 히스패닉, 백인들이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주눅이 들었다. 새벽녘 태평양 너머에서 일어난 일을 그네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귀 기울였을 리가 없다. 지레 자격지심이 꿈틀대고 부끄러움이 엄습하는 건 평소에 콧대 높였던 '케이(K)'가 한꺼번에 뭉개지는 기분 탓이었을까.
집회가 예정된 총영사관으로 가는 동안 속보가 떴다.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를 수용한다는 윤 대통령의 담화가 나왔다. 새벽잠을 깬 지 6시간만이다. 항의 시위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든 동포들은 '계엄 철폐' 같은 팻말은 덮어두고 '윤석열 탄핵' '윤·건희를 체포하라' 같은 구호가 적힌 팻말을 모아 들었다.
집회를 조직한 목사는 "윤석열, 하야하라!"고 소리지르며 팔뚝을 치켜올렸다. 미국시간으로 아침 나절에 CNN 등 온갖 매체에서 톱뉴스로 쏟아낸 계엄관련 소식은 한국정치에 무관심했던 2,3세 한인동포들에게도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MZ세대들은 저마다의 부모 형제에게 전화해 "한국에서 왜 마셜 로(계엄령)가 나왔냐"고 어리둥절해 했다. 길고 복잡하게 설명한들 알아듣겠는가.
"미친 대통령이 미친 짓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