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유망한 우완 투수가 글러브를 내려놓았습니다. 지난 2007년 신인왕 출신 두산 베어스 우완 투수 임태훈(26)이 25일 스스로 임의 탈퇴를 요청했습니다. 사실상 은퇴를 결정한 것입니다. 지난 2011년 불미스러운 일로 내리막길을 걸었던 임태훈을 더는 마운드에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발표 시점이 이상합니다. 일부에선 '물타기(손해 위험을 줄이려는 방법)'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네요. 왜일까요?
25일 오후 2시 50분. 기자는 두산과 SK의 시즌 8차전이 열리는 잠실구장으로 향합니다. 햇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린 날씨는 65년 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장으로 가는 도중 잠시나마 눈을 감고 묵념을 하는 저는 비정상일까요. 경건한 마음으로 잠실에 도착해 '오늘도 파이팅'을 외쳐봅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한국 프로야구를 대변한 걸까요. 사전 인터뷰를 위해 더그아웃을 찾자마자 '배드 뉴스(bad news)'가 연달아 터집니다. 오후 4시 8분.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한 통의 보도자료가 옵니다. '한화 최진행, KBO 반도핑 규정 위반 제재'라는 제목입니다. 곧바로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진행(29·한화 이글스)이 지난 5월 실시한 도핑테스트 결과에서 세계반도핑기구(WADA) 규정상 경기 기간 중 사용 금지 약물에 해당하는 스타노조롤(stanozolol)이 검출돼 30경기 출장 정지의 제재를 부과했다는 것입니다. 24일까지 타율 3할1리 13홈런 42타점으로 한화 중심 타선을 이끌었던 최진행이었기에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두산-SK 감독의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실로 돌아오자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일부 대기자들의 입에서 '임태훈'이란 이름이 조용히 거론됩니다. 그리고 이내 두산 관계자가 올라와 이야기합니다. "임태훈이 스스로 임의 탈퇴를 결정했다. 본인이 허리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임의 탈퇴를 요청했다. 당분간 쉬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며 "여러 가지 사건을 겪다 보니 심신이 많이 지친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밝히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순간 기자실이 술렁였습니다. "왜 하필 '오늘'이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구단 관계자는 "잘 모르겠다. 우연의 일치다"고 말합니다. 모양새가 참 이상합니다. 최진행의 '도핑 사건'에 묻혀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닙니다. 이날 잠실구장을 찾은 20여 명의 기자 역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산 관계자를 바라봅니다. 물론 모두가 생각하는 일명 '물타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항상 '왜?'에서 시작하는 기자들의 직업병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물타기' 이야기까지 흘러나왔을까요. 바로 임태훈이 과거 스캔들에서 낙인 찍힌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던 선수였기에 구단 측에선 '최진행 사건'으로 팬들의 시선이 몰린 사이 조용히 임태훈의 임의 탈퇴 소식을 알렸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이죠. 그렇다고 마냥 소설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임태훈은 지난 2007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1차 지명으로 두산에 입단했습니다. 프로 데뷔 첫해 7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해 팀 동료 김현수(27)를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습니다. 이듬해엔 6승 5패 6세이브 14홀드를 기록했고, 2009년 11승(5패 4세이브 13홀드)을 작성하며 '10승 투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2010년엔 9승(11패)을 올리며 제 몫을 다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며 기량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날개를 펴지 못했습니다. 2011년 불미스러운 일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질타를 받으며 1군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설상가상 허리까지 다치며 힘들게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거둔 승수는 단 6승에 불과했습니다. 올해 2군에서 묵묵히 재기를 노렸으나 허리 통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군 등판 없이 다이아몬드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프로에 데뷔해 많은 관심과 사랑도 받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질타와 악성 댓글도 경험했습니다. 결국, 임태훈은 만 26세라는 이른 나이에 쉽지 않은 선택했습니다. 본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도 누구의 박수를 받지 못한 분위기입니다.
그래도 한마디는 하고 싶네요. "임태훈 선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편, 이날 임태훈의 잃은 두산은 SK에 7-8로 패했습니다.
[더팩트ㅣ잠실구장 = 이성노 기자 sungro51@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