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부터 임기 만료 '폐기 연속'…제조물책임법 과거와 현재
'제조사에게 입증 책임 전환해야' 요구도
지난달 1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역 교차로에서 차량이 인도로 돌진하는 사고로 시민 9명이 숨졌다. 이 사고를 낸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했으나, 경찰은 운전자의 '운전 조작 미숙' 탓에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결론지었고 검찰은 지난 20일 구속기소했다. /박헌우 기자 |
'시청역 참사' 등을 계기로 차량 급발진 문제와 고령 운전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지고 있고, 고령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악화일로다.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을 온전히 운전자의 실수로 돌리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상대적 사고율이 높다는 통계만으로 고령 운전자의 면허 반납 요구도 설득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노인들의 이동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은 물론 지자체별 혜택 차이 등 실효적 측면은 깊이 고민할 지점이다. <더팩트>는 총 6회에 걸쳐 국내외 급발진 사례와 판례,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제조물 책임법과 고령 운전자 면허 반납에 대한 한계를 짚어보고 방향을 제시해 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신진환·김정수 기자] 급발진 주장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시민 9명이 숨진 서울시청 인근 교차로 역주행 돌진 사고와 3명이 다친 국립중앙의료원 돌진 사고가 발생했다. 또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도 주차된 차를 들이받은 남성도 급발진을 주장했다. 자동차 급발진은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원인불명의 이유로 갑자기 속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현행법은 차량의 결함을 소비자가 증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인과 집단의 다툼이라는 소비자의 불만이 많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빗댈만큼 '제조물책임법'은 원인이 되는 법안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법안은 언제 입법화됐을까. 민사상 손해배상에 관한 법률인 '제조물 책임법'은 1999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초선이었던 추미애 새정치국민회의(더불어민주당 전신) 의원이 발의했다. 이 법안은 제조업자가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생명,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를 입은 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률로써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제품 결함으로 피해를 본 소비자(피해자)를 보호하고자 입법화된 것이다. 유예기간을 거쳐 2002년 7월부터 시행됐다.
제조물 책임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소비자가 '결함'이 있는 제품으로 피해를 봤을 때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했다. 이 법의 시행 전후로 의미하는 결함은 통상적으로 생명과 신체 또는 재산상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수준으로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소비자(피해자)가 '제조 또는 가공된 동산' 제품 결함에 대한 직접적인 요인과 제조업자의 고의나 과실 여부를 입증해야 했다. 비전문가인 일반인이 제품의 결함을 직접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2년부터 논의돼왔던 제조물 책임법이 무려 20년 만에 제조물 책임법이 시행되면서 소비자(피해자)가 사고 원인에 대한 입증 책임을 지는 것에서 제품결함을 입증하는 것으로 바뀌게 됐다. 그러나 소비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이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자동차나 전자기기 등 고도의 기술집약적 제품의 경우 과학적·기술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특히 자동차 급발진 책임 입증을 두고 제조업자와 소비자 간 불공정 거래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일각에서 제조물의 결함이 발생하면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지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2002년 시행 이후 관련 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더팩트 DB |
법 개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확대하면서 18대 국회에서 입증 책임을 제조업자에게 부담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제조업자는 소비자의 손해가 소비자 과실 등 다른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면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손해로 추정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소비자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점을 노려 악의적 불법행위를 일삼는 제조업자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자는 법안도 마찬가지였다.
19대 국회에서도 제조물 결함 관련 규정을 손본 법안이 2건 발의됐지만, 소위원회에서 제대로 심사조차 되지 않았다. 두 법안 중 하나는 제조물 결함 규정을 '제조상의 결함, 설계상의 결함, 표시상의 결함뿐만 아니라 기타 통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안전성이 결여된 것'까지 포괄·확대해 제조업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동차 급발진 원인 규명의 사례에서 보였던 소비자의 입증 책임의 불합리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끝내 휴지조각이 됐다.
20대 국회에선 2017년 3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영향으로 제조물 책임법이 개정됐다. 제조업자가 제조물 결함으로 인해 중대한 손해를 본 소비자에게 3배 이내 범위에서 손해를 배상하도록 했다. 또한 피해자의 입증책임도 완화됐다. 피해자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등의 사실을 증명하면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다. 피해자가 제조물의 결함과 손해 내용,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 책임을 다소 경감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동시에 법 개정 전 확립된 판례 취지를 그대로 도입했을 뿐 여전히 소비자의 입증책임 부담이 크다는 지적도 있었다.
제조물 자체가 광범위하지만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에서의 핵심 쟁점은 그대로다.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해마다 몇십 건씩 발생하고 있어도 손해를 본 소비자가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제조업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입증해야 한다. 현행법은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손해의 배상책임을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손해의 존재 및 손해액 규모 등을 입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여야가 제조물 책임법 개정에 나섰으나 흐지부지됐다.
특히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시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이도현 군(12)이 안타깝게 숨진 이후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시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로 입증 책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빗발쳤다. 여야 모두 관련 법안을 국회에 냈음에도 정쟁에 매몰되면서 이른바 '도현이법'으로 불린 제조물 책임법안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 국회의 소극적인 결과다. 그로 인해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는 거대한 제작업체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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