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기획-머나먼 장애인 참정권⑤] "'쉬운 투표' 의무화가 필요하다"
입력: 2020.04.30 00:00 / 수정: 2020.04.30 11:07
머나먼 장애인 참정권 기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팩트>가 만난 장애인, 장애인 단체 관계자들은 쉬운 공보물, 쉬운 투표를 의무화해야 제대로 권리가 지켜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이종성·김예지 미래한국당 당선인, 백정연 소소한 소통 대표,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센터장. /남윤호·허주열 기자
'머나먼 장애인 참정권' 기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팩트>가 만난 장애인, 장애인 단체 관계자들은 "쉬운 공보물, 쉬운 투표를 의무화해야 제대로 권리가 지켜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이종성·김예지 미래한국당 당선인, 백정연 소소한 소통 대표,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센터장. /남윤호·허주열 기자

"잘 살펴보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6월 8일 지방선거 사전투표 후 장애인들을 만나 참정권 행사의 문제점 등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선거 때마다 불편을 호소한 장애인들은 대통령의 발언에 기대했다. 그리고 약 2년이 흘렀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난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고 장애인들은 토로한다. 헌법 제24조에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이대로는 2년 뒤 열리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장애인 참정권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팩트>는 7개 장애인 단체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문가, 21대 총선 장애인 당선인 3명의 인터뷰를 통해 장애인 참정권 실태를 직접 듣고, 2022년 대선 전 개선 방향을 모색한 [TF기획-머나먼 장애인 참정권]을 총 5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배려' 아닌 '권리' 찾기 위한 당사자들의 제언

[더팩트ㅣ이철영·허주열·박숙현·문혜현 기자] "장애인 참정권은 16년 전 제가 처음 장애인 관련 일을 할 때보다는 정말 많이 발전했어요. 우리 사회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봐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아직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생각해요."(백정연 소소한 소통 대표)

누군가에는 당연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장애인의 참정권 행사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정보 습득부터 투표까지 여러 제약을 받고 있다.

장애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어진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기 위한 방안을 지속해서 정부와 정치권에 건의했다. 그 결과 21대 총선에선 전국 1만4330개 투표소 전체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의 출입이 가능했고, 모든 투표소에 장애인 투표 보조원이 한 명씩 배치됐다.

하지만 시각·청각·뇌병변·발달(자폐성)·지적(정신)장애인 상당수는 여전히 참정권 행사에 제약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정상적 투표가 불가능했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기본권을 제대로 행사하게 해 달라"는 기본적 요구는 왜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았을까. 총선에 참여한 장애 관계자들의 제언을 들어보자.

◆결정권자의 무관심이 부른 미완의 '장애인 참정권' 보장

장애인은 크게 15개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각 유형별로도 장애의 편차가 크다. 때문에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된 참정권 보장 방안을 마련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지속적인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결정권을 가진 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훈(왼쪽)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연합회 사무실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만나 장애인 참정권 보장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허주열 기자
김훈(왼쪽)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연합회 사무실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만나 장애인 참정권 보장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허주열 기자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은 "19대 국회에선 장애인 당사자인 최동익 의원(더불어민주당, 시각장애인)이 있어 '점자기본법',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등이 통과됐지만, 20대 국회에서 장애인 관련 입법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는 장혜영 정의당 당선인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공보물은 배려가 아닌 권리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이스 코드도 마찬가지다"라며 "권리가 촘촘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데, 다양한 유형의 장애 당사자들의 정보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는 공보물을 만드는 걸 '의무조항'으로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근본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장애인에 대한 편의시설 제공을 의무조항으로 바꾸면 많은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면서도 "법 개정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행법인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공직선거법 6조(선거권행사의 보장)에 장애인의 선거를 위해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근거가 있으니 선관위가 지침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장애인이 유형에 맞게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안 의무화해야"

하지만 선관위는 다른 규정을 더 우선하는 모양새다. 발달·지적장애인들에 따르면 선관위는 이번 총선에서 갑자기 지침을 바꿔 시각·신체장애인을 제외한 장애인들이 기표 행위에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지침을 바꿨다.

이에 따라 지난 지방선거까지 가족의 도움을 받아 투표했던 장애인 상당수가 투표소 관계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투표를 망치는 일이 다수 연출됐다.

이런 논란에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공직선거법 157조 6항에는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다"며 "장애인들이 무조건 보조를 받을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어 법에 더 충실히 하기 위해 신체장애인 보조를 중심으로 지침을 바꿨다"고 해명했다.

21대 총선은 끝났고, 2년 뒤 또 다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대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미완의 장애인 참정권은 다음 선거에선 완성을 이룰 수 있을까. 중앙선관위가 만든 21대 총선 포스터. /중앙선관위 제공
21대 총선은 끝났고, 2년 뒤 또 다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대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미완의 장애인 참정권은 다음 선거에선 완성을 이룰 수 있을까. 중앙선관위가 만든 21대 총선 포스터. /중앙선관위 제공

이 관계자는 이어 "장애유형이 다양해 장애인 보조 여부에 대한 판단은 현장에서 투표 관리관이 했다"며 "육안으로 모든 장애유형을 판단할 수 없어 일부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못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관위는 법에 정해진 것을 운영하는 기관"이라며 "(국회에서) 입법으로 장애유형별 보조 가능 여부를 명확하게 규정하면 우리는 그에 맞춰서 운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뒤집어 말하면 국회에서 장애인 참정권 관련 명확한 법을 만들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가운데 장애인과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은 의무조항과 관련한 구체적 방안도 제시했다.

◆장애인을 위한 공보물과 투표용지는?

먼저 정보 취득과 관련해 김 연구원은 "공보물 면수 제한 폐지(국회의원 선거 12면, 대통령 선거 16면 등), 점자형공보물 제작사 연락처 기재, 음성바코드 촉각돌기 표기 또는 위치 고정 등의 방안을 건의해왔는데 시행이 안 되고 있다"며 "시각장애인의 정보 취득을 위해선 이 방안들만 시행해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의 생활을 돕는 이대휘 활동가는 "후보자 명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필수로 기재하는 것과 명함 한쪽에 QR코드를 넣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백정연 소소한 소통 대표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선 쉬운 공보물 제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며 "쉬운 표현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한자어 등 어려운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공보물에도 유니버설 디자인(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을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투표 행위를 어려워하는 발달장애인을 위해 투표용지를 보다 쉽게 바꾸고, 칸과 칸 간격을 넓힐 필요가 있다"며 "기표와 관련해선 가족이나 활동지원가 등의 보조가 가능하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소한 소통 백정연 대표(가운데)와 주명희 총괄본부장이 지난 21일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사무실에 취재진과 만나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허주열 기자
소소한 소통 백정연 대표(가운데)와 주명희 총괄본부장이 지난 21일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사무실에 취재진과 만나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허주열 기자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센터장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장애인을 위한 쉬운 공보물 제작, 쉬운 투표용지 사용, 공적 조력인 배치를 보장해야 한다"며 "21대 국회에선 이런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혁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자립지원팀장은 "그림투표용지를 제작하면 발달장애뿐 아니라, 지체장애, 뇌병변장애 등 다른 유형의 장애자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비장애인 중 치매 어르신, 문맹이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장애와 비장애인이 협력과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한다"고 쉬운 투표용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눈치 보지 않고 '혼자' 투표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도 필요"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용지는 규격 등이 선거관리 규정에 포함돼 있다"며 "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별도 투표용지를 제작하기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국회가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전용 투표소 운영에 대한 방안도 나왔다. 오창석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정책지원부 부장은 "지체장애인의 투표를 가장 어렵게 하는 부분은 이동권 보장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미국의 경우 드라이브 스루처럼 차에서 투표를 할 수 있다는 데 이런 방안도 좋을 것 같고, 안 된다면 투표소 입구에 장애인을 위한 전용 투표소를 설치해 그쪽에서 투표를 하게 하는 방안이 시행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 활동가도 "일반 유권자의 배려를 기대하게 하지 말고 지하철의 노약자석처럼 장애인투표소로 별도로 구분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라며 "궁극적으로는 장애인이나 선거 취약자가 혼자서 투표하는 것을 목표로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센터장은 지난 22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투표용지와 관련해 그림(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제안했다. /허주열 기자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센터장은 지난 22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투표용지와 관련해 그림(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제안했다. /허주열 기자

김철환 활동가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감염, 재난 상황에서 장애인들에게 어떤 형태로 정보를 전달할지 기준이 없었던 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선 감염병 사태로 (장애인이) 정보권 통제를 받았다"라며 "나아가 재난 사태에서의 보호조치 등에 대한 기준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선관위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현장에서 안내인들이 장애인 방문 시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도록 기본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모든 투표소에서 숙지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장애인 참정권 문제는 과거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배려'가 아니라 주어진 '권리'를 찾기 위한 이들의 목소리가 현실에 반영되기 위해선 정부와 정치권이 더 분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관위 관계자는 "매번 선거를 앞두고 장애인 단체와 간담회 등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의견수렴을 하고 있다"며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해결하고, 법 개정 및 예산이 필요한 장기적 사안은 적극적으로 정치권에 요청해 반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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