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기획-상고제도 개혁③] '유전무죄' 사법부 불신 풀어야...국회도 걸림돌
입력: 2019.08.09 05:00 / 수정: 2019.08.09 16:25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심 재판이 지난 5월 29일 첫 공판 이후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는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도입과 법관 해외파견을 얻어내기 위해 박근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재판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 등을 받고 있다.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급증하는 상고사건 해소와 상고심 기능 정상화를 위해 별도의 '상고법원' 신설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상고법원' 설치 입법을 법원 안팎의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밟지 않은채 불리한 여건 속에서 밀어부쳤고, 결국 71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판거래' 의혹으로 기소된 전직 대법원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양 전 대법원장 후임인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한 지 2년이 다 됐지만 대법원에 접수되는 사건은 여전히 매년 늘어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26일 취임사를 통해 현행 상고심 문제를 인정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상고제도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으나 취임 2주년을 한달 앞둔 최근에야 '상고심' 제도 해법찾기에 나섰다. 이에 <더팩트>는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 2년을 맞아 왜 다시 상고제가 논의되고 있는지, 다른 나라의 사례는 어떠한지, 해결책은 뭐가 있는지 등을 3편의 기획보도로 알아보고자 한다. 3편에서는 상고허가제를 시행 중인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고, 전문가들의 의견과 함께 오랜기간 논의만 됐던 상고제도 개편이 실행되기 위해선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사법선진국, 중요한 사건만 상고심 허용

[더팩트 송은화 기자] 사법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독일, 일본은 모두 상고를 제한하는 제도를 통해 최고법원이 사건 수를 조절하고 있다. 세부적인 제도 운용 방식 등에는 차이를 나타냈지만, 의미있거나 중요한 사건에 한해 상고심 판단을 받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으로 구성되는 비공개평의에서 표결을 통해 상고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연방대법관 9인 중 4인 이상이 찬성하는 경우 본안에 대한 구두변론 절차가 개시된다. 상고허가제를 운용해 △연방법률 또는 연방헌법조항의 해석에 관한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통용되는 사법절차에 심히 벗어나 그 교정이 필요한 경우 △연방법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연방대법원의 선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하급심 법원의 판결을 심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등에만 상고를 허가한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1946년 도입한 상고심 이원화 및 상고수리제도를 그대로 이어 운영하고 있다.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낸 점이 우리와 차이라는 지적이 많다. 일본에서 민사는 고등재판소가 일부 상고심을 심리하도록 이원화돼 있으며, 형사에서 상고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독일도 민사와 형사사건 상고제도가 구분된다. 민사는 상고허가제로, 형사는 고등법원과 연방일반법원이 사건 중요도에 따라 상고심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국내 역시 1981년 상고허가제를 도입했지만 군사독재 시대의 산물로 민주적 정당성이 낮다는 점과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0년 폐지된 바 있다.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이 상고허가제를 이상적으로 꼽으면서 재조명 받고 있지만 '재판은 삼세번까지 받아봐야 한다'는 국민의 법 감정이 워낙 뿌리깊어 재도입에는 부정적 여론이 클 수 밖에 없다. 일부 전문가들은 차라리 우리 실정에 맞는 제3의 상고심 제도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에 소극적인 이유는

이처럼 국가별로 다양한 상고 제도를 응용할 수 있지만 우선 대법관을 증원하는 게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라는 목소리도 크다. 정작 대법원은 대법관 증원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인사청문회 등 대법관 1명을 임명하는데 걸리는 절차와 시간 등을 감안할 때 비현실적인 면도 지적된다.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전원합의체 구성이 어렵다는 점도 제기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대법관을 늘리면 대법원의 위상과 희소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권위주의적 사고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 때문에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연구 성과도 찾아보기 힘들다. 14년 전인 2005년 6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개최한 '대법원 기능의 재정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발표된 김윤상 당시 서울중앙지검 검사의 지정토론문이 지금도 참고할 만하다.

김 검사의 발표문에 따르면 2004년 기준 대법관 1인당 연평균 사건부담은 1484건이지만 대법관을 증원해 28명으로 운영하면 636건으로 줄어든다. 하루 처리 건수로 보면 종전 1일에 5.93건에서 2.5건으로 줄어들게 된다. 예산 면에서도 당시 대안 중 하나로 거론됐던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보다 대법관을 증원하는 게 좀더 경제적이라고 분석했다. 고법 상고부에 27명의 판사가 필요하다고 보면 당시 급여 기준으로 약 13억원이 든다. 이 예산이면 대법관 25.6명을 증원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변호사는 "최고법원의 권위는 대법관 수의 희소성이 아닌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판결을 할 때라는 것을 대법관들이 알아야 한다"며 "다양한 대법관 구성과 함께 정원도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법농단으로 퇴색된 '상고법원' 재논의?

법조계에서는 '대법원 재판은 재판연구관들이 다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법관 증원에 회의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때문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추진된 상고법원 설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변호사)는 "양승태 전 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태로 상고법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크지만, 사실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미 1심 재판에서 단독사건, 합의부 사건으로 나뉘어져 상고할 경우 단독은 지방법원 항소부로, 합의부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심리하는 사실상 이원적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면서 "이처럼 상고법원과 대법원으로 이원화해서 심리하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오 교수는 특히 "재판은 3번은 받아봐야 한다는 게 우리 국민들의 법감정이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재판에 대응하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객관적 시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상고법원보다 상고허가제를 대안으로 본다. 과거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열린 '상고제도 개선방안' 공청회에서도 상고법원 설치보다 상고허가제 도입이 효율적이라는 제안도 많았다. 상고법원을 두면 사실상 4심제가 돼 법원의 권위주의만 강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관예우' 등 사법부 불신부터 해소해야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7일 변호사 A씨가 법무부 변호사징계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이의신청 기각 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판사 출신 A씨는 2015년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은 B씨의 항소심 재판의 변호를 맡았다. 착수금 3300만원을 받은 뒤 추가로 수임료를 3300만원 더 받았지만 B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상고도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B씨는 대한변호사협회에 "A씨가 항소심 재판장과의 연고를 드러내면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선전했고, 실형이 선고될 경우 성공보수로 받은 3300만원을 돌려주기로 했지만 반환하지 않았다"며 A씨에 대한 징계를 청원했다 .이에 대한변협 징계위원회는 A씨에게 과태료를 부과했고 A씨는 법무부 변호사징계위원회를 상대로 징계 취소를 요구하는 이의신청을 했으나 기각당해, 즉시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역시 패소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관예우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변호사와 재판장의 사적 친분이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재판을 시작하면 대다수가 하급심 판결에 불복해 다시 심판해 달라고 상고한다. 사건의 당사자들인 국민들이 최종 판단을 대법원에서 받기를 희망하는 것을 문제 삼기 보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의 근원부터 찾아 해소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법원행정처), 사법연수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가 2018년 1월 10일 대법원에서 열린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자리에 앉아 있다. /더팩트 DB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법원행정처), 사법연수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가 2018년 1월 10일 대법원에서 열린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자리에 앉아 있다. /더팩트 DB

'상고심 제도 개선' 국회 관심 절실

'상고심 제도 개선의 필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수 십년간 진전이 없다. 이미 18대, 19대 국회에서 상고법원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상고법원안은 2014년 6월 17일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대법원에 건의해 12월 19일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서는 '상고심사부'로 상고심 제도를 개편하겠다는 법안이 발의됐다. 검사 출신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2018년 "고등법원에 상고 여부를 판단하는 상고심사부 설치하겠다"고 대표 발의했다.

대법원 입장에서는 절실한 과제이지만 국회에서는 논의조차 않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 내부를 비롯해 국민, 국회까지 상고제도 개선을 설득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신설을 입법화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도 실패한 전례가 있어서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1년간 대법관 1인당 맡은 사건 수의 평균이 5000건으로 계속 증가추세라는 언론 보도와 함께, 소송 당사자들은 사건 내용이 담기지 않은 1장 짜리 '상고 기각' 결정문을 받는 모습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민들은 언제쯤 진정한 대법원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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