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무법적인 대통령들로부터 비롯된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혼란.무차별적으로 휩쓸고 간 초대형 산불… 미국과 한국의 지난 겨울은 인재(人災)와 천재(天災)로 기억될 공통적인 시대상을 연출했다. 그 와중에 프로야구 시즌이 열렸다. 봄의 전령처럼 야구가 시작됐다.
한국의 KBO리그는 개막시리즈부터 구장마다 만원사례 간판을 걸었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일본 도쿄에서 LA다저스와 시카고 컵스가 공식 개막 2연전을 갖고 일주일여 만에 30개구단이 일제히 2025시즌을 출발했다.
어떤 이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판국에 무슨 공놀이냐고 혀를 찰 것이다. 또 다른 쪽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포기할 순 없지 않느냐고 입맛을 다신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이뤄지는 게 인간사다. 세찬 눈보라 속에서도 새싹은 움트는 게 섭리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살면 살아지는 거다"라는 애순(아이유) 엄마의 한마디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일상의 끄트머리를 붙들어매라는 삶의 지침이다. 요즘처럼 삶이 고통스러울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다윗왕의 지혜스러운 문구와 함께 시끄러운 속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한마디 아닐까 싶다.
프로야구의 계절은 복잡다단한 세상의 어지러움을 세 시간여 동안 잊기에 그만이다. 야구장의 문이 열리자 환한 얼굴로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부러워질 지경이다. 메이저리그는 내셔널 패스타임(National Pastime)이라는 대체불가한 별명을 갖고 있다.
미국 동북부 지역에서 아마추어 야구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1856년 뉴욕 머큐리라는 주간신문이 야구의 인기를 '국민적인 놀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19세기 들어 프로팀이 생기고 20세기 초반 그 대중적 인기가 거세지면서 내셔널 패스타임은 자연스럽게 야구를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고 싶어하는 정치인, 특히 대통령이 야구를 내버려둘 리 없다.
1865년 미국의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은 뉴욕주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브루클린 어슬레틱스라는 아마추어 야구팀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전국 야구팀 대표라는 명분을 붙였다. 오늘날 백악관으로 스포츠 우승팀을 초청하는 전통의 첫 단추였다. 신시내티 레드스토킹스는 4년 뒤 18대 대통령 율리시즈 그랜트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한 최초의 프로야구팀이 됐다. 21대 체스터 아더 대통령은 1883년 클리블랜드 포레스트 시티스를 초대했다. 백악관을 방문한 최초의 메이저리그팀이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대통령의 시구가 또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잡았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라운드의 마운드를 밟기 전까지만해도 대통령들은 귀빈석에서 그라운드로 공을 던져넣어 시구(First Pitch)가 아니라 '퍼스트 토스(Toss)'였다. 1933년부터 1945년 사망할 때까지 제32대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재임 12년 동안 대공황과 세계 2차대전을 치르면서도 무려 8차례나 야구장에서 '퍼스트 토스'를 했다.
메이저리그 우승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는 관례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 야구 외에도 풋볼, 프로농구, 프로아이스하키, 전미대학스포츠리그 챔피언 등으로 넓혀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의 우승팀을 불러 백악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은 대통령들에게 머리 아플 일 없이 국민적인 지지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LA다저스 선수단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다저스 선수들은 4월 7일 워싱턴 내셔널스와 경기를 치르기에 앞서 백악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LA지역에선 트럼프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 게 낫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LA를 포함한 캘리포니아에서 트럼프가 대선 당시 얻은 지지율은 8%에 불과하다. 엔젤리노들은 다저스 선수들이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웃으며 사진 찍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2018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초청했지만 그의 인종차별적인 정책과 강경한 이민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알렉스 코라 감독과 2018시즌 MVP 무키 베츠 등 주요 멤버들은 불참, 메이저리그팀에 대해 꽁한 마음이 있다. 특히 당시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다저스가 투수교체를 잘못해 졌다고 '엄청난 실수를 했다'고 비난해 데이브 로버츠 감독 또한 불편한 마음이 남아 있을 법하다.
아닌 게 아니라 다저스의 스타플레이어 무키 베츠는 백악관 방문을 "가족과 얘기해본 뒤 결정하겠다"고 주저하고 있다. 로버츠 감독은 " 미국 최고의 공직자가 초대한 것은 영광스럽다"라며 "백악관에 가겠다"고 했다. 2019년 트럼프가 자신을 비판한 것은 "지나간 일"이라고 했다.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가진 유학생이나 미국 시민권자인 한국계 대학생이 가자지구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추방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사회 대응방식을 보면 다저스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가 트럼프와 악수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게 마땅찮기는 하다.
오타니만이라도 백악관의 초청을 거절하면 그 메시지는 상당한 울림이 있을 터다. 하지만 오타니가 백악관을 방문하지 않으면 뒤끝이 남다른 트럼프가 무섭게 보복할 지도 모른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외국인 선수는 소득세를 더 내라"고 외칠 수도 있으니 꾹 참고 사진 한장 같이 찍어주는 게 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