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응시하던 장정구는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정구 실화'가 영화로 탄생하는 만큼 한국 복싱 부흥의 밀알이 되었으면 한다. "복싱이 '못 먹고, 못 사는 나라가 하는 스포츠'라는 통념이 있어요. 그런데 미국은 왜 아직까지 복싱 인기가 좋을까요? 우리 민족성이 좋았던 순간은 빨리 잊고,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어요. 복싱의 인기를 되찾는 것이 힘들 것 같아요"
한국 복싱의 침체는 씨름과 비슷한 맥락으로 흘렀다. 글로벌 시대에 다다르면서 변화에 둔감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복싱을 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회적 편견'이 지배해 있고, 일명 '없어 보이는 운동'으로 전락한 복싱의 그릇된 인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복서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바뀌지 않는 한 복싱의 중흥은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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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복서' 장정구(48) / 사진 - 문병희 기자 |
◆ 전설의 15차 방어…시청률도 50% '쑥'
"가난해서 복싱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편견도 속상해요. 운동을 좋아했고, 어린 시절에 공부 보다는 운동이 더 재미있었고 잘 했던 것 같아요." 장정구의 기량은 학창시절부터 눈에 띄었다. 1980년 MBC 신인왕전에서 우수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했다. 그러나 1982년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일리시오 사파타와 타이틀 매치에서 1-2 판정패했다.
"주먹구구식으로 경기를 했던 것 같아요. 경험도 부족했죠. 판정패를 하고 그때부터 상대 선수의 장·단점과 움직임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쓴 잔을 본 장정구의 재도전은 6개월 만에 이뤄졌다. 또 다시 사파타에 재도전했다. 그리고 당시 경기가 열린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사파타를 3회 TKO로 쓰러뜨리고 한국 복싱 사상 12번째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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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구는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올라 무려 15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
"'내가 정말 챔피언이 된 건가'라고 생각했죠.(웃음) 복싱을 시작했을 때 세계 챔피언까지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이후 1988년까지 무려 15차 방어에 성공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가 경기하는 날에는 TV 시청률이 50% 이상을 기록했고, 시내 한복판이 한산해질 정도였다. 경기당 대전료 또한 7천만 원에 달해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 이상이었다.
"일본에서 열린 15차 원정 방어전(對 오하시 히데유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첫 원정이어서 부담이 컸어요. 일본인들이 '오하시~ 오하시~' 큰 목소리로 응원 하는데…. 저는 나중에 그 소리가 '나를 응원 한다'고 생각했죠.(웃음)" 장정구는 15차 방어전에서 오하시를 맞아 8번의 다운을 빼앗은 끝에 8회 TKO로 이겼다. 공교롭게 이 승리는 현역 시절 마지막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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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구는 2000년 WBC가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복서에 선정, 2009년에는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
◆ 전 아내-장모의 배신…절망 속 운명적 만남
그야말로 거침없는 상승세를 탄 장정구는 15차 방어에 성공한 뒤 갑작스레 챔피언 벨트를 내놓았다.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1985년 챔피언 시절 결혼했던 아내가 장모와 함께 장정구의 명의로 돼 있던 부동산과 재산 명의를 자신의 것으로 바꾼 것이다. 한순간 장정구는 홀몸이 됐고, 이후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 소송을 걸었지만 슬하의 두 아이를 위해 자진 취하했다.
"인생의 큰 실수였죠. 복싱에 전념해서 세계 챔피언이 됐지만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돌아왔어요."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는 동안 그토록 아귀처럼 달려들던 도전자를 상대했을 때도 그토록 힘든 적이 없었다. 두 여자의 배신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치명타였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절망에 빠진 그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물질을 잃은 대신 진정한 사랑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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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했던 현역 시절 만큼, 예기치 않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
"어려웠던 시절 저를 진심으로 챙겨준 지금의 아내(이숙경)을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금전하고 바꿨다고 생각해요.(웃음) 복 받았죠. 20여 년 째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의 아내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해 서울 유명 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단식투쟁까지 하며 장정구와 결혼했다는 전언으로 유명하다. 장정구의 제2의 삶을 열어준 운명이었다.
장정구는 경제적인 문제로 1989년 다시 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움베르트 곤살레스(멕시코)와 재기 전에서 12회 판정패했고, 1990년과 1991년 연패를 당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 전적 38승(17KO) 4패. 인생의 모든 것으로 여기던 '복싱'과 함께 젊은 날의 단편이 막이 내렸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복싱과 바꿨어요. 유년도 청소년기의 추억도 없죠. 어린 나이에 세계 챔피언에 올라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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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싱'이 안겨다 준 인생의 행복을 또 다른 자신의 거울로 벗 삼아 제2의 삶을 꿈꾸고 있다 |
'운명의 빛'이라 했던가. 하루의 시작은 빛이요, 하루의 밝음은 만남이랬다. 어둠에서 벗어나 밝음이 오고 만남의 시작이 이어진다. 장정구에서 복싱은 빛이었다. 젊은 날의 모든 것으로 치부되며 지금은 제2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의 복싱 인생에도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복싱의 중흥, 인간 장정구가 이루고픈 마지막 운명의 빛이다.
"어린 시절 제 아버지는 상당히 무서운 분이셨어요. 사랑받은 기억이 별로 없죠. 지금의 고마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제가 못 받은 사랑을 두 배로 주고 싶어요. 그 사랑 속에서 제 복싱 인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싶어요. 더팩트 독자여러분들, 늘 건강하시고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 [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 14번째 주인공은 '역도의 전설' 전병관 편입니다.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