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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각의 링 위에서 만나 본 '복싱 여제' 김주희/문병희 인턴기자 |
[유성현 인턴기자] "펀치 한 방 날려주세요!"
세계 여자 프로복싱 챔피언의 '주먹 맛'은 어떨지 새삼 궁금했다. 만나자마자 대뜸 던진 당찬 한마디에 별안간 링 위로 향한 두 사람은 몇 번의 펀치를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상처 없이 깨끗한 얼굴로 수줍게 웃어 보이는 김주희(25·거인체육관)의 외모는 그저 평범한 20대의 여성으로 보일 뿐, '사각의 정글'을 호령하는 챔피언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보였다.
진하게 땀내가 밴 글러브를 벗고 링에서 내려와 잠시 체육관을 둘러보니 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최근 배우 이시영이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거두면서 체육관을 찾는 여성들도 덩달아 늘어났으리라는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아낼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대표적 스포츠인 복싱은 아직도 여성들의 도전이 쉽지 않은 영역인 듯 했다.
이내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샌드백 치는 소리. 그토록 외로운 '사각의 링'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10여 년째 이어가고 있는 김주희의 모습이었다. 어려운 가정사를 극복하고 여성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6개 기구 타이틀을 석권, 한국이 낳은 '복싱 여제'로 등극한 김주희를 지난 11일, 서울 문래동 거인체육관에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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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많은 챔피언 벨트가 그간의 노력을 짐작케 한다 |
◆ ‘밀려드는 후원’ 정중히 거절…"받으면 노력 소홀해질 것 같아"
지난해 9월, 4대 기구 통합 타이틀전을 극적인 판정승으로 마친 김주희의 얼굴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시퍼렇게 부은 눈부터 얼굴 전체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런 얼굴로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김주희의 '백만불 짜리 미소'는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 후 어느덧 6개월, 김주희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고 맑기만 했다. '얼짱 복서'라는 애칭도 충분히 수긍할 정도의 외모였다. 그러자 김주희는 "복서 치고는 예쁘다는 말이죠?(웃음) 사실 그때는 코뼈도 부러지고 얼굴은 엄청 부어올랐었죠. 워낙 피부가 얇은데다 이번엔 심하게 다쳤던지 2주면 낫는 상처가 두 달이나 가더라고요"라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때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최근 강연 제안도 쏟아지고 있다. 이달 초에는 괴산으로 강연을 다녀와 수많은 청중 속에서 '성공 스토리'를 풀어 놓은 그였다. "사실 '어린 내가 강연할 자격이 되나' 싶기도 해요. 근데 감사하게도 제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어요. 운동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만 하고 있어요."
김주희는 강연 뿐 아니라 매년 지속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대외 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한 때 불우한 가정환경을 겪었던 그에게 '나눔'의 의미는 어색하지 않을까 물었다. "저도 소녀가장인데다가 그리 넉넉한 형편도 아니에요. 어쩔 때는 쌀이 없어 밥도 못 먹었을 때도 있었어요. 그만큼 제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얼굴도 모르는 분들께 후원 제안도 많이 받았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좋다고 다 받게 되면 지금처럼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엔 저보다 어려운 분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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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6대 기구 타이틀을 석권한 세계 유일 여성복서 김주희 |
◆ '멍청해서 성공한' 김주희 "연습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IMF 당시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배고픈 운동'인 복싱에 더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단다. 게다가 김주희는 왼쪽 엄지발가락 일부가 없다. 지난 2007년 골수염을 앓아 어쩔 수 없이 절단해야했다. 쉴 새 없이 링 위를 누벼야하는 복싱선수로서는 엄청난 핸디캡인 셈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어떤 분이 자리를 양보해 주셨어요. 순간 저를 알아보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절뚝이는 다리 때문에 몸이 불편한 아이인 줄 알고 비켜주신 것이었어요. 사실 선수로서는 엄청난 핸디캡이죠. 그래도 피나는 연습으로 이겨낼 겁니다. 연습량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
김주희는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어떨 때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를 지도한 정문호 관장은 오히려 그 부분이 현재의 김주희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는 "관장님이 '네가 멍청해서 좋다'라고 말하세요. 재능이 있다면 노력이 부족해 여기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 같다고요"라며 정 관장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관장님이 매일 저를 보내고 난 후에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찰나, 그는 이내 말을 이어갔다. "챔피언 벨트를 닦으시는 일이예요. 제가 어렵게 이걸 따냈기 때문이 아니래요. 만약 제가 졌을 때 깨끗한 벨트를 상대에게 주기 위해서래요.(눈물을 훔치며) 제가 흘린 땀들보다 훨씬 더 노력한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챔피언 벨트에 대한 애착과 그간의 노력. 백 마디 말보다도 많은 의미를 지닌 김주희의 눈물이었다. 그래도 이내 김주희는 씩씩함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지면 안돼요. 챔피언 벨트 많이 땄다고, 저 혼자 살겠다고 운동을 그만둘 수는 없어요. 10년 동안 저 하나만 믿고 이끌어준 관장님이 계셔요"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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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뷔 당시부터 '얼짱 복서'라는 애칭으로 유명세를 치른 김주희 |
◆ 남자친구? "저 무서워서 누가 사귀겠어요?"
어느덧 데뷔 10년차, 하지만 그의 또래들은 한참 외모에 신경 쓸 20대 중반의 여성이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지 못해 아쉬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저도 꾸미는 거 싫어하지 않아요. 근데 본분이 운동선수라 꾸미는 건 무리가 있죠. 어느 자리에서든 1인자가 되려면 남들 다 하는 만큼 하면 안돼요"라며 챔피언다운 책임감도 드러냈다.
이처럼 자기관리가 철저한 김주희의 사생활은 어떨까. 이내 주량과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봤다. "술이요? 안 먹어봤어요. 수학여행 때 맥주 종이 반 컵 정도? 그 이후 먹을 자리도 있었지만 저는 운동선수잖아요. 안 마시는 것이 당연하고 마시면 큰일 나는 거죠.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예요. 사귀고는 싶은데 누가 저 무서워서 사귀겠어요?(웃음)"
이어 그는 "친구들이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해도 남자들이 절 알고는 다 무서워해요. 그런데 '샌드백하고 결혼했어요' 뭐 이런 식상한 말은 안할래요(웃음). 선수 생활 할 때는 안하더라도 서른 넘어서는 결혼 해야죠"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작은 거인', '얼짱 복서', '효녀 복서' 등 다양한 그의 애칭처럼 대화를 나눌수록 다채로운 매력이 물씬 풍겼다. 개인적으로 어떤 애칭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그런 말 들으면 완전 손발이 오그라들어요.(웃음) 그래도 저 역시 여자니까 예쁘다고 말씀하시면 기분 좋죠"라며 머쓱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효녀 복서도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편찮으신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다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저는 단지 권투를 한다는 이유로 더 안타까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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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임 없는 노력파'로 널리 알려진 김주희의 훈련 모습 |
◆ 남은 벨트는 하나, 자신과의 싸움은 계속된다
세계 여자 프로복싱 7대 기구 중 6개의 타이틀을 손에 넣은 김주희는 마지막 남은 WBC(세계복싱평의회) 타이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당 타이틀은 현재 일본 선수가 보유하고 있지만 대전료가 맞지 않아 성사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최근 발생한 일본 대지진까지 변수로 떠올랐다. 그렇게 언제 열릴지 모를 경기를 위해 김주희는 매일같이 피나는 연습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처럼 오직 복싱 하나만 보고 달려온 김주희의 이야기는 5월 중순 자서전으로 엮어 출간될 예정이다. 김주희는 "과거 매사에 부정적이었던 제 인생이 권투 하나로 달라졌죠. 그땐 어려웠지만 '꿈을 이루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달려오니 이런 이야기를 전하게 되는 날도 오게 됐죠"라며 이른 나이에 자서전을 출간하는 감회를 드러냈다.
어느덧 인터뷰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시간을 뺏을 수 없어 마지막으로 '인간 김주희'가 느끼는 복싱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물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뭐랄까, 복싱은 제 인생 전부예요. 단지 운동만 배운 게 아니라 작은 예절부터 습관까지 모든 걸 가르쳐줬으니까요. 아, 그리고 지난 경기 이후 많이 걱정해주신 팬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시합에는 수비에 더 신경 써서 많이 다치지 않을게요. 그렇다고 수비만 치중하는 시합보다는 더욱 화끈한 경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말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드릴게요!"
◇ 김주희 프로필
▲출생=1986년 1월 13일 서울 ▲체격=160㎝, 50kg ▲학력=문래중-영등포여고-중부대 엔터테인먼트학-중부대 대학원 교육학 ▲경력=2002년 전국여자복싱 신인선수권대회 데뷔 ▲수상내역=2010 라이트플라이급 4대기구(WIBA, WIBF, GBU, WBF) 통합 챔피언, 2010 세계복싱연맹(WBF)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2010 국제여자복싱협회(WIBA) 라이트플라이급 슈퍼챔피언, 2009 국제여자복싱협회(WIBA) 올해의 우수선수상, 2009 라이트플라이급 통합 타이틀전 챔피언, 2008 국제여자복싱협회(WI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2007 여자프로복싱세계권투협회(W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2004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2003 주니어플라이급 한국챔피언 ▲별명=작은 거인, 얼짱 복서, 효녀 복서 ▲좌우명=자랑스러운 거인이 되자
<글 = 유성현 인턴기자, 사진 = 문병희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