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유병철 전문기자] # 기다리다 못해 대통령선거 1주일을 앞두고 펜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나오겠지 했는데, 5월 26일 현재까지도 주요 대통령후보들의 공약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미 대선'으로 불리는 제21대 대통령선거(6월 3일)는 뜬금없는 계엄선포와 이에 따른 탄핵으로 급하게 치러지고 있죠. 그렇다고 해도 많이 늦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진 19대 대선 때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투표 22일 전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11일 전에 공약집을 냈습니다. 대선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물어보니 민주당(후보 이재명)과 국민의 힘(김문수)은 사전투표일(29~30일) 전에는 공약집을 내려고 애를 쓰고 있고, 개혁신당(이준석)은 별도로 준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대의민주제에서 선거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누구나 ‘정책선거’를 강조합니다. 정책은 선거공약(Campaign promise)에 농축돼야 하고, 각 공약은 매니페스토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매니페스토는 ‘예산 확보 및 구체적인 실행 계획 따위가 마련되어 있어 이행이 가능한 선거 공약’을 말하죠. 쉽게 말해 재정확보, 일정, 담당자(부)가 명기된 ‘찐 공약’입니다.
매니페스토를 통해 선거운동 과정에서 발전적인 토론을 하고, 장기적으로 국가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라고 선거에 국민세금을 쓰는 것이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네 선거는 공약집에 메니페스토 정신을 반영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구 던져지는 공약보다는 공약집이 중요합니다.
# (아직) 공약집이 없으니 일단 각 후보가 중앙선관위에 등록한 주요 공약을 살펴봤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후보들의 10대 공약이 있고, 각 공약에는 목표-이행방법-기간-재원조달방안 등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재원조달 방안은 기존재원활용, 정부재정 지출구조 조정분 등 헛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허술한 부분이 많았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대상은 TV 초청토론에 참가하는 주요정당의 후보 4명(상기 3명에 민주노동당 권영국)으로 정했습니다.
#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최소한 주성택 교수(가천대)가 얘기하는 ’스포츠건강청‘ 비슷한 얘기는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예 체육공약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후보 3명은 아예 체육 분야 공약이 없었고, 권영국 후보(민주노동당)만 공약 순위 9번째인 ‘교육·문화·인적자원·스포츠' 분야에서, 그것도 엘리트체육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몇 가지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정책을 언급했습니다.
심지어 이준석 후보는 10대공약 첫 번째 ’행정‘ 파트에서 정부부처 개편 및 축소를 다뤘는데 문화체육관광부를 문화부로 명칭을 변경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실효성을 떠나 이명박 정부 때 문화관광부에 ’체육‘을 추가해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가 됐는데 그마저 뺀다는 얘기죠. 체육인들이 서운할 만한 대목입니다.
# 과거에도 이랬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2년 대선 때 양강인 윤석열, 이재명 후보는 체육공약을 쏟아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가장 많은 8개 분야 35개 세부공약을, 윤석열 후보는 4개 분야 12개 세부공약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중도사퇴)도 적으나마 체육공약을 공표했습니다.
체육인 복지 강화 및 일자리 창출(이상 이재명), 초등학생 1인 1종목 특기적성 계발(윤석열), 적절한 체육시간 보장(심상정), 체육인 공헌에 걸맞은 정당한 보상책 마련(안철수) 등입니다. 제법 인상적인 공약들이 있었고, 특히 이재명 윤석열 양강 후보는 경쟁이 치열했던 탓인지 체육인들의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은 물론, 각종 체육행사에 적극적으로 얼굴을 내비쳤습니다. ‘우생순’의 주인공인 민주당의 임오경 국회의원은 당시 보도자료를 내며 이재명 후보의 체육공약이 더 낫다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이번은 왜 이럴까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체육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3년 전보다 체육이 덜 중요해져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선거 초반 이재명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았죠. 잘나가는 쪽은 체육 정도는 신경쓰지 않아도 쉽게 이긴다고 여기고, 약자들은 집토끼 바깥토끼 등 할 일이 많은데 한가하게 무슨 체육 같은 소리냐고 대응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선거막판 지지율 격차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결승점이 가까워질수록 후보들이 체육에 시선을 돌릴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최근 대한체육회 이사 출신의 한 체육인은 "양쪽(이재명 김문수) 캠프에서 특보 임명장을 받았다. 투표날이 다가오면서 대선 캠프의 체육쪽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 정치인들이 체육을 대하는 태도에는 진정성이 결여돼 보입니다. 체육은 그렇게 하찮은 분야가 아닙니다. 손흥민 이정후 등 한국산 슈퍼스타는 물론이고, 올림픽 월드컵 등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선수들의 활약은 감동적입니다. 국위선양, 국민통합에 경제적 효과까지 엘리트 체육은 많은 역할을 수행하죠.
생활체육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몸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분야는 의학과 체육뿐입니다. 굳이 예방의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한결같이 "운동하세요"라고 권합니다. 건강을 넘어 삶의 질 향상에도 운동은 필수입니다. 성공한 기업인이자 지금은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한 짐킴홀딩스의 김승호 회장은 초기저서 ‘김밥 파는 CEO'에서 삶이 고단할 때 ’일단 몸부터 움직여라. 집안청소를 하거나, 동네 한 퀴라도 돌아라‘라며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맞습니다. 스스로 땀을 흘리는 몸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체육에 1달러를 투자하면 3달러 이상의 의료비가 감소하는 효과가 난다고 합니다.
# 체육의 외형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소년체전에 1만 7,000명이 넘는 선수가 참가하고 있고, 고등학생 이상이 출전하는 전국체전은 3만 명에 육박합니다. 또 매년 2만 명에 달하는 스포츠 전공자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합니다. 2023년 체육백서를 보면 전국 667개 대학(전문대 포함)에 스포츠 관련 학과가 운영되고 있으며 재학생은 약 7만 4,500명에 달합니다.
보통 직접적으로 체육에 관여하는 사람을 통틀어 ‘백만 체육인’이라고 합니다. 적지 않은 숫자죠. 여기에 전 국민의 60% 정도가 1주일에 1회 이상, 30분 이상 운동하는 생활체육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정치의 '체육 홀대'라는 못된 관행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백만 체육인도 유권자입니다. 체육 공약을 따져 투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정치인들도 체육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표만 따지는 정치인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일단 체육인들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그저 힘 있는 정치인을 좇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당당한 체육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체육인의 각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육계의 올곧은 리더십이 절실합니다. ‘체육 증발 대통령선거’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