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역사상 최초로 48개국 체제로 확장된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조별리그 1차전의 포문을 열며 본격적인 대장정에 돌입했다. 경기 수가 104경기로 대폭 늘어난 만큼, 우리가 알던 기존의 월드컵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차방정식이 펼쳐지고 있다. 단순히 ‘이기고 올라간다’를 넘어, ‘어디서,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짜느냐’가 우승컵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 변수다. 거대해진 판도 속에서 토너먼트 대진표가 짜 놓은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들을 짚어본다.

◆ 19일 멕시코전, 계산기 필요 없는 사실상 ‘조 1위 결정전’
홍명보호는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체코를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며 쾌조의 출발을 알렸다. 32강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지금, 오는 19일(한국시간) 펼쳐질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2차전은 사실상 조 1위를 조기에 확정 지을 수 있는 외나무다리 매치다.
이번 대회부터 순위 결정 방식에 아주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승점이 같을 경우 ‘전체 골득실’을 가장 먼저 따졌지만, 이번 2026 대회부터는 ‘승자승(Head-to-Head)’ 원칙이 제1 순위 기준으로 격상되었다.
따라서 약체 남아공이 남은 두경기를 전승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한국이 2차전에서 멕시코를 꺾고 승점 6점을 확보해 둔다면, 설령 최종 3차전에서 한국이 지고 멕시코가 이겨 두 팀이 승점 6점 동률이 되더라도 전체 골득실을 계산할 필요도 없이 한국이 무조건 조 1위가 된다. 과거처럼 약팀을 상대로 누가 더 골을 많이 몰아넣었느냐를 따지는 ‘골득실 세탁’의 불합리한 시나리오가 원천 차단되는 셈이다. 반면, 멕시코와 비길 경우에는 최종 3차전까지 치른 뒤 골득실을 따지는 피 말리는 계산기 싸움으로 접어들게 된다.

◆ 대한민국, ‘독이 든 성배’ 조 1위냐 vs ‘실리’의 조 2위냐
대표팀이 마주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짜릿한 고민은 ‘조 몇 위로 올라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리한가’이다. 광활한 북중미 대륙의 환경은 대진표 구조와 맞물려 양날의 검을 밀어 넣고 있다. 특히 어느 길이든 16강에서 세계 최강의 팀들이 버티고 있어 8강행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 조 1위의 딜레마: 멕시코시티 ‘알박기’와 잉글랜드라는 벽
한국이 A조 1위를 차지하면 32강과 16강을 이동 없이 해발 2240m의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스타디움에서 치른다. 조별리그부터 고지대(과달라하라 1571m)에서 적응을 마친 한국으로서는 ‘이동 동선 제로’와 ‘고도 적응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쥔 채 평지에서 올라온 상대 팀을 체력적으로 압도할 수 있다.
32강에서는 C,E,F,H,I 조 3위 가운데 한 팀을 만나지만 하필 ‘죽음의 조’들이 많아 대진 예상 후보군이 스코틀랜드 에콰도르 스웨덴 사우디아라비아 세네갈 등으로 만만치 않다. 여기서 이기면 또 16강에서 L조 1위(톱시드 잉글랜드 유력)를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다. 8강행의 최대 고비를 맞게 되는 셈이다. 아울러 8강에 진출하는 순간, 미국 동부 끝 마이애미까지 2000km에 달하는 살인적인 장거리 이동이 시작된다는 대가가 따른다.
▶ 조 2위의 실리: ‘LA 홈 어드밴티지’와 이동 피로
조 2위로 진출하면 32강 경기장이 미국 LA의 소파이 스타디움으로 배정된다. 거대한 한인 사회의 압도적인 응원을 등 뒤에 업고, 스위스 캐나다 카타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속한 B조 2위를 상대하는 32강 대진도 수월할 것으로 판단돼 사실상 ‘홈경기’ 분위기 속에서 실리를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대진과 일정의 함수관계를 따져보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조별리그 최종전 이후 LA(32강), 댈러스(16강)로 이어지는 동선은 시차 2시간과 장거리 비행 피로를 유발하는 고난길이다. 게다가 32강을 통과하더라도 16강에서는 F조 1위(네덜란드·일본 유력) 혹은 C조 2위(브라질·모로코 예상) 선상에서 올라온 세계 최강국들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야 한다. 잉글랜드 라인을 피하는 대가치고는 체력적 방전과 대진의 잔혹함이라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 역사적 앙숙과 정치적 라이벌,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48개국 체제의 촘촘한 대진표는 세계 축구사의 오랜 라이벌 스토리를 조기 소환하고 있다.
▶ 사상 첫 ‘월드컵 한일전’의 조건
F조의 일본(네덜란드, 스웨덴 등과 경합)과 한국의 조 진출 순위가 엇갈릴 때 성사된다. 한국이 A조 2위, 일본이 F조 1위로 각각 32강을 격파하면 16강에서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한일전 단판 승부가 벌어진다. 반면, 한국이 조 1위를 사수하고 일본이 조 3위 와일드카드로 턱걸이 진출을 할 경우, 토너먼트 첫 판인 32강에서 곧바로 한일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는 충격적인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 '세계축구사의 앙숙' 아르헨티나 vs 잉글랜드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1986 멕시코 월드컵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이어진 세계축구사 최고의 앙숙이다. J조의 아르헨티나와 L조의 잉글랜드가 이변 없이 조 1위로 순항해 토너먼트를 격파해 간다면, 결승 길목인 준결승에서 역사적인 슈퍼매치가 성사된다.
▶ '전쟁의 앙금' 미국 vs 이란
정치적 전운이 감돌던 두 팀의 대결도 매우 이른 시점에 성사 가능하다. D조 1위 가속도를 붙인 미국과, G조에서 이란이 벨기에·이집트를 따돌리고 1위로 올라서 각자 32강을 통과하면 16강에서 정면 충돌한다. 만약 두 팀이 동시에 조 2위로 떨어지면 32강 승부에서 곧바로 만나는 잔혹한 대진이 기다리고 다.
▶ '우승 후보의 동선' 프랑스 vs 스페인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인 프랑스(I조)와 스페인(H조)은 조별리그 성적에 따라 만나는 지점이 극명하게 갈린다. 두 팀이 최소 조 2위 이상을 유지할 경우 준결승 이전에는 절대 만날 일이 없다.
두 팀 모두 조 1위 통과하거나 조 2위로 통과할 경우 대진표 상 우승 길목인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한 팀은 1위, 다른 한 팀은 2위할 경우 두 팀은 대진표 좌우로 완전히 분리돼 토너먼트 내내 만나지 않으며, 오직 결승에 가서야 마지막 패권을 가리게 된다.

◆ ‘다크호스’ 일본의 역설적 고민, 그리고 거장들의 '라스트 댄스'
이번 월드컵 다크호스로 평가받는 일본(F조)은 대진표의 초반 난이도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F조 1, 2위는 32강에서 C조 2, 1위와 각각 격돌하게 되는데, 이는 토너먼트 첫판부터 브라질이나 모로코라는 거대한 벽을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조 2위 통과 시 16강에서마저 I조의 프랑스나 노르웨이 같은 헤비급 강호들이 기다린다. 일각에서 "차라리 조 3위로 진출하는 편이 낫다"는 역설적인 계산법이 나오는 이유다. 32강 예상 상대 중 프랑스라는 거대한 벽만 피한다면, 미국·독일·스위스·멕시코 등 나머지 대진 후보군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지켜볼 만한 대륙간 라이벌들의 시나리오도 흥미롭다.

▶ 메시 vs 호날두 ‘라스트 댄스’
아르헨티나(J조)와 포르투갈(K조)이 모두 조 1위를 차지할 경우, 대진표상 8강에서 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전설의 마지막 월드컵 맞대결이 8강에서 성사된다면 지구촌 전체가 들썩일 것이다.
▶ '남미의 슈퍼클래시코' 브라질 vs 아르헨티나
두 팀 모두 조 1위 진출 시 준결승 격돌 동선이 짜여 있으며, 한 팀이 조 2위로 미끄러질 경우 오직 결승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
▶ '북중미 안방 라이벌' 미국 vs 멕시코
공동 개최국인 북중미의 두 맹주는 토너먼트 4강 또는 결승에서 외나무다리 대결을 펼치도록 대진이 분리되어 있다. 맞대결 성사 시 북중미 대륙 역사의 일대 사건이 될 전망이다.
48개국으로 판이 커진 만큼 이변의 크기도, 경우의 수가 주는 묘미도 깊어졌다. 토너먼트 진출국이 32개국으로 대폭 늘어난 이번 북중미 월드컵은, 조별리그 최종전의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다양한 전술적·전략적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