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축구대담②] 한일 최고의 축구선수는 차범근과 미우라 (영상)
- 김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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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3.06.26 14:09 / 수정: 2013.06.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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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갈색폭격기'로 명성을 날린 차범근 SBS 축구 해설위원. 일본 축구전문기자는 차범근을 존경하는 선수로 꼽았다. / 스포츠서울 DB
한국과 일본. 세기가 바뀌어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뿌리 깊은 역사의식으로부터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쟁하고 있다. 특히 스포츠, 그중 축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축구만큼 전 세계 어디서나 즐기는 종목이 드물다. 내셔널리즘이 가장 확고한 종목이다. 한일 축구는 항상 치열하게 대립하는 라이벌 관계이자 동반자로 불린다. 그래서 우리는 궁금하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속마음 말이다. 진정한 동반자로 여기는지 라이벌로서 꼭 이겨야만 하는 상대로 생각하는지. < 더팩트 > 은 한국 축구가 이란과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최종전에서 월드컵 8회 연속 진출을 확정한 다음 날인 19일 양국을 대표하는 축구기자 간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한일 축구 동반 브라질행에 대한 시각/서로가 존경하는 선수/유럽파 현주소 등을 주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다. 때론 조언을, 때론 설전이 오가며 그라운드 못지않은 즐거움과 긴장감이 맴돌았다. 무엇보다 양국의 축구가 지금보다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엔 동의했다. 대담은 스포츠서울TV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
○ 대담 날짜 :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오전 10시 / 더팩트 사무실 ○ 진행 / 참가자 : 김용일 더팩트 기자 / 심재희 더팩트 축구팀장, 요시자키 에이지 일본 축구전문 기자
▶ [한일 축구대담①] "김신욱 활용법에 韓 월드컵 성패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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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넘게 한일 축구 현장을 누빈 베테랑 축구 전문 프리랜서 기자 요시자키 에이지. / 유재영 인턴기자
주제 2. 한국-일본 서로 존경하는 선수
- 두 번째 주제는 훈훈한 분위기가 될 것 같다. 한일을 대표하는 축구 기자인 만큼 서로 존경하는 선수를 꼽아달라.
심재희, 이하 심) 많은 분이 같은 생각일 것 같다. 미우라 가즈요시를 꼽을 수밖에 없다. 1992년 다이너스티컵으로 기억한다. 당시 일본이 한국과 예선에서 0-0으로 비겼다. 결승에서 다시 만나 2-2 무승부를 거둔 뒤 승부차기로 이기면서 '타도 한국'에 성공했다. 그 중심엔 미우라가 있었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은 물론 '가즈 댄스'로 불리는 헛다리 드리블을 우리 선수들 앞에서 선보이는 등 '저 선수 대체 뭐지?'라고 생각했다. 수차례 당시 경기 영상을 돌려봤는데, 좌우 측면은 물론 중앙에서도 번뜩이는 플레이를 하더라. 프리킥도 왼발 오른발을 다 사용하는데, 솔직히 일본 선수 중 양 발을 잘 쓰는 선수를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1993년 도하에서 열린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도 한국을 상대로 결승 골을 터뜨렸다. 물론 우리가 '도하의 기적'으로 불리면서 월드컵에 극적으로 올랐으나 정말 미우라 때문에 떨어질 뻔했다. 당시 미우라를 '미워라'로 불렀던 기억. 한국 나이로 46세다. 지금도 선수로 뛰면서 J리그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 않은가. 자기 관리가 대단한 선수다. 이젠 '미워라'가 아니라 위대한 선수가 됐다.
요시자키) 미우라 말씀을 하셨으니 떠오른 기억이 있다.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때 한국엔 최영일이라는 스토퍼가 있었다. '미우라 킬러'였다.(웃음) 우리가 얼마나 얄미워하고 미워했는지 모른다. 기자가 된 이후 최영일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에 갔다. 그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에 갔는데, 한쪽 벽에 미우라와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있더라. 와, 어찌나 아름다운지. 당시 내게 "미우라와 조기 축구회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본인은 스트라이커를 하고 있는데, 미우라가 나오면 다시 수비를 해주겠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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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일본 축구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미우라 가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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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며 J리그 각 부문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 그야말로 미우라는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우라가 축구에 대한 진정성,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국내 팬들에게도 잘 각인된 것 같다. 박지성 선수 자선경기에 나서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나.
심) 일단 기량이 훌륭했다. 그리고 스토리가 있는 선수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뒤 4년 후 프랑스 월드컵을 와신상담 기다렸다. 우즈베키스탄과 아시아 최종예선 1차전에서 4골을 넣으면서 존재감을 보였다. 그런데 이후 일본이 한국에 '도쿄 대첩'의 희생양이 되는 등 부진한 경기를 보이면서 꼬였다. 본선 직행 티켓이 주어지는 조 1, 2위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나카타 히데토시 중심의 전술로 개편됐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이란을 이기면서 첫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이란전에서 골을 터뜨렸던 나카야마 마사시의 골 뒤풀이였다. 나카야마가 미우라보다 생일이 빠른 것으로 안다. 골을 넣은 뒤 자신의 유니폼 속에 미리 입고 있던 미우라의 유니폼을 보여줘 감동을 줬다. 그럼에도 미우라는 부진에 부상까지 겹쳐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요시자키) 그렇다. 끝내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심) 미우라가 상징적인 존재가 됐던 게 일본 축구의 성장을 이끈 건 맞다. 그러면서 소마, 나나미, 로페스, 야마구치 등 일본 축구 역사의 새로운 스타들이 연달아 탄생했다. 당시 세대와 지금의 세대들이 잘 어우러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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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분데스리가 전설의 외국인 선수로 남아있는 차범근 SBS 축구해설위원. / 스포츠서울 DB
- 요시자키 기자가 생각하는 한국의 존경하는 선수는.
요시자키) 흔한 선수를 꼽지 말라고 하셔서.(웃음) 똑 부러지게 말하겠다. 차범근이다. 유럽 무대에서 뛴, 뛰고 있는 아시아 선수를 놓고 보자. 주연과 조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박지성 선수는 분명 조연에 가깝다. 차범근과 함께 분데스리가를 누빈 오쿠데라도 조연이었다. 나카타가 주연에 도전하려 했으나 중간에 좋지 못했다. 나카무라 슌스케는 셀틱에서 주연 구실을 했는데, 스코틀랜드 리그가 워낙 약했다. 결국, 유럽에서 주연으로 성공한 선수는 차범근이 유일하다. 가가와 신지 선수가 그 길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2선에서 뛰고 싶은데 측면으로 밀리고 있지 않은가.
- 당시 최고의 빅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 307경기 98골을 넣은 차범근 현 SBS 축구해설위원이다. 골도 골이지만, 10시즌을 머물렀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요시자키) 그렇다. 페널티킥 골이 단 한 골도 없다. 1985~1986시즌 덴마크의 전설 알란 시몬센이 가지고 있던 분데스리가 용병 통산득점(76골) 기록을 차범근이 깼다.(차범근의 기록은 14년이 지난 1999년 스위스 용병 사퓌자가 경신함) 라이벌로 불린 오쿠데라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전술적으로 인정을 받긴 했다. 하지만 주연은 아니었다.
심) 당시만 해도 중계 환경이 워낙 떨어진 시대였다. 그만큼 국내로 들어오는 차범근 선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박찬호와 비교가 됐다. 1990년대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아시아 투수 최다승(124승)까지 거두지 않았나. 만약 차범근 당시 선수가 박찬호나 박지성만큼의 중계 환경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축구를 더 많이 하려고 했을 것 같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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