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철래 대표권한대행, 대학생 신부와 결혼한 '사연'
  • 소미연 기자
  • 입력: 2011.07.14 11:49 / 수정: 2011.07.14 14:27

[박형남·소미연 기자] 국회의원회관 822호실. 미래희망연대 노철래 원내대표 의원실 출입문은 항상 열려있다. 다른 급한 일정이 없으면 노 원내대표와 '즉석 만남'도 가능하다. 쉴 틈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노 원내대표. 경청을 미덕으로 꼽지만 '할 말은 한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러나 사실 노 원내대표의 어린 시절은 이와 사뭇 다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국어책을 읽으라고 호명하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럼이 많았다. 당시를 떠올리는 노 원내대표는 "모든 게 가난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이 기가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얘기다.

"어려운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해서야 검정 고무신을 신을 수 있었다. 당시 돌이 깔린 시골길을 2.5km 정도 걸어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맨발로 걸어니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고 부모님께서 검정고무신을 입학선물로 준비해 주셨다."

▲ 충남 서천 문산에서 출생한 노철래 원내대표(오른쪽)는 배를 타고 군산고등학교를 통학했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 충남 서천 문산에서 출생한 노철래 원내대표(오른쪽)는 배를 타고 군산고등학교를 통학했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검정고무신 한 켤레도 선뜻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학업은 포기할 수 없었다. 노 원내대표가 나고 자란 충남 서천 지역에는 고등학교가 없어 전북 군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여름같이 해가 길면 통학을 했고, 해가 짧아지는 겨울엔 자취를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것보다 노 원내대표에겐 서러움이 더 컸다.

"타지역 학생이다 보니 놀림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교 3년을 다니면서 이름이 없어졌다. 당시 도로가 없어서 금강을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학교 내에선 ‘물 건너 온 놈’으로 불렸다."

가난과 서러움은 노 원내대표를 법학도로 이끌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사법고시 패스는 가난을 끊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노 원내대표는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입학한 이후 고시에 대한 열망보다 정의감이 더 불타올랐다. 책으로 배운 것과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 현실의 간극을 줄이고자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경찰서에 잡혀가서 얻어터지고, 최류탄을 맞고, 종국엔 강제로 입영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군대생활도 편치 않았다. 집에 6개월 동안 편지를 못 쓰게 할 정도로 요주의 인물로 꼽혔던 것. 제대를 앞뒀을 땐, '김신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 날짜도 미뤄야 했다. 이로써 노 원내대표의 복무기간은 만3년에서 14일이 빠지는 35개월16일이다.

▲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학과를 진학했지만 유신정권을 거치면서 더 큰 꿈을 갖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학과를 진학했지만 유신정권을 거치면서 더 큰 꿈을 갖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제대한 이후에도 노 원내대표는 고시를 보지 않았다. 대신 정치를 선택했다. 국회 역시 법을 만드는 입법부인 만큼 전공도 살리고, 가난도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찍부터 정당 생활을 시작한 노 원내대표는 신민주공화당부터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등 여러 정당을 거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 정치 거물들을 근거리에서 지켜봤다. 그러나 정작 정치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서청원 전 대표를 만나면서부터다.

"서 전 대표는 내가 서천지역 사무처장할 때 처음 만났다. 서로 충청도가 고향이다 보니 충청도 현안에 대해 상의해오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자칭 분신역할을 하고 있다."

서 전 대표를 통해 박근혜 전 대표와의 인연도 시작됐다. 정치 스승이나 다름없는 서 전 대표가 선택한 박 전 대표였기 때문에 지지를 결심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학시절 유신정권과 맞서 투쟁했던 노 원내대표로선 복잡한 심경이었을 터였다.

"서 전 대표가 '같이 하자' 해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무엇보다 내게 감동을 준 것은 박 전 대표의 정치관이다. 한나라당 경선에 나오면서 박 전 대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경선에 이어 해외 특사를 떠날 때도 같은 말이었다. 이미 언론에서도 몇 차례 나왔지만, 박 전 대표는 '나는 어느 특정인을 위해 경선에 참여하는 게 아니고, 특정인을 위해 특사로 가는 게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가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피해를 본 것과는 차별화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 노철래 원내대표의 가족사진. 연배보다 2~3년 늦게 결혼해 아들과 딸이 어린 축에 속한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 노철래 원내대표의 가족사진. 연배보다 2~3년 늦게 결혼해 아들과 딸이 어린 축에 속한다. / 사진제공=노철래 의원실

20년이 넘도록 정신없이 달려온 정치인생이라 아내 변상진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도 크다. 8살 연하인 변씨는 대학 졸업을 하루 앞둔 1980년 2월24일 노 원내대표와 결혼을 했다. 결혼식 당일은 서울 시내에서 보내고, 다음날 25일 졸업식에 참석했다. 경북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지금까지 노 원내대표의 내조에만 힘써왔다.

"군 제대 후 학교까지 졸업하고 정당 활동을 하고 있던 와중에 한 교수의 주선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대학 3학년 학생으로 22살이었다. 처음엔 학생이라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하려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정말 괜찮더라.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했는데, 사실 장인과 장모가 결혼을 반대했다. 나이가 많은 게 문제였다."

특히 장인은 노 원내대표에게 호적을 확인하자고까지 했다. 당시엔 '아홉수'를 넘기면 안 된다고 해서 보통 27~28세에 결혼을 많이 했는데, 노 원내대표는 서른을 넘긴 나이였던 만큼 결혼에 한 번 실패했거나 잘못된 돈거래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장인의 생각이었다. 노 원내대표는 장인에게 진심을 담아 사실을 고백했다.

"장인에게 내가 시골에서 어렵게 자랐고, 모아둔 돈도 없는데, 결혼하려면 셋방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니 결혼 시기가 늦어졌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거꾸로 나를 좋아해주셨다. 나이를 먹은 만큼 생활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여든을 넘긴 장인과 장모는 노 원내대표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결혼을 계속 반대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 텔레비전에 간혹 노 원내대표가 얼굴을 비추기라도 하면 주변 분들에게 “우리 사위”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그러면 노 원내대표는 껄껄 웃을 뿐이다.

<사진=문병희 기자>

hih1220@media.tf.co.kr

pink2542@tf.co.kr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