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의원 “아버지로부터 ‘쓴맛’을, YS로부터 ‘신뢰’를 배웠다”
  • 서종열 기자
  • 입력: 2011.05.19 12:52 / 수정: 2011.05.19 16:38

[서종열·박형남 기자] “너는 정치하지 마라. 우리 집하고 안 맞아!”

정치만큼은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듣던 아이가 20여년이 지나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장성한 그는 아직도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버리지 않고, 정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여당 원내대표 등을 지낸 4선 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정치’의 매력에 빠져 고교 시절부터 ‘데모 대장’으로 활동하며 ‘대통령’을 꿈꿨던 한나라당 김무성(60) 의원의 삶에는 ‘열정과 투쟁심’이 가득했다. 특히 제5대 참의원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정치, 그리고 몸으로 깨달은 경험을 접목해 그런지 ‘정치를 읽는 눈’이 수준급이다.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김 의원은 부드러운 외모에 투지와 열정이 넘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면모를 풍겼다. 그는 한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다, 원내대표 수락 후 친박계 의원들로부터 “배신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무사히 원내대표 임기를 마치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바로 그다.

더팩트이 주최한 ‘2010년 국회 보좌관이 뽑은 우수 국회의원’으로 선정된 김무성 의원의 인생 스토리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어 봤다.

- 제5대 참의원을 지낸 아버지 김용주 의원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어떤 분이셨나?

공산주의자 양성 차원에서 모스크바대학교에 스카우트됐지만 아버지는 부모님을 뵙는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으셔서 이를 포기했어요. 그리고는 포항에 있는 은행에 취직하셨지요. 나름대로 성공했던 아버지는 딸을 학교에 보내려 하는데 ‘일본 사람 아니면 못 들어간다’는 말에 화가 나 재산의 반 이상을 털어 학교를 만들었어요. 그게 영흥초등학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여기를 나와서 인연이 있어요.

이후 아버지는 주일본 공사 시절 엉뚱한 요구를 하면 말을 안 듣고 하다 모함을 당해서 그만두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옳지 못하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학교를 가면 여선생님이 ‘이승만 할아버지~’라고 얘기하고, 선거 때는 ‘이승만 찍어라’라고 하더군요. 그때도 선생님 생각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의 어린아이였는데도 항의했죠. 이 때문에 선생님은 발로 내 발등을 밟는 등 은연 중에 학대를 하곤 했어요.

-초등학교 생활도 순탄치 않았겠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승만 물러가라’라고 했어요. 데모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는데 ‘데모야! 데모야!’ 외치며 돌아다녔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와 교장 선생님에게 야단맞기도 하셨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싸움대장'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조직에서 매일 매일 도전을 하는데 아무리 힘 좋은 나도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딱 4일 타이틀을 뺏겼어요. 피곤해서 그랬죠.(웃음)

그러한 과정을 거치다 4.19 혁명이 난 후 아버지가 참의원이 됐을 때 선생님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어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랬지요.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뀐 대우를 경험하게 됐어요. 그것도 잠시였어요. 5.16 군사정변이 발생, 아버지가 참의원을 그만두시게 되면서 또다시 학교 분위기는 싸늘해졌어요.

-정말 놀기 좋아하고 술을 잘 먹었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장래 희망란에 대통령이라고 썼어요.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 모르고 했는데, 그 뒤로 대통령 생각은 멀리하고 ‘주어진 상황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라는 좌우명만 새기게 됐어요. 또 매사 당당하려고 했죠. 이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건방지다, 놀기 좋아하고 술 잘 먹는 녀석’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 거죠.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즐겨 마셨습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이를 갚아야 되는데 따뜻한 술을 주니 이를 마시지 않고 화웅의 목을 따온 뒤 식지 않은 술을 먹었다는 일화가 멋있었어요. 그래서 부엌에 가서 '정종'을 데워 마시기 시작했지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술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대학교 때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노상 막걸리집, 소주집 등 전국의 모든 술집을 돌아다녔어요. 이른바 주당이죠. 여담으로 박희태 국회의장이 폭탄주를 처음 만든 주인공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저예요.(웃음)

고등학교 시절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한 이후 너만큼은 정치를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예요. 아버지는 ‘민주주의 순수한 의도를 좌절시켰다. 우리나라는 못 산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잘 살려고 하는 박정희 정권은 옳다. 당분간 경제가 발전할 때까지는 자유를 좀 미루고 민주주의로 가는 실험을 해봄직하다. 단 부정부패는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러한 얘기를 아버지와 장시간 상의한 결과 정치는 안하기로 했어요. 대신 사업을 하기로 했죠. 그래서 실망해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아버지와 정치를 안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봐요. 대학 시절 한번은 술 먹고 명동 사거리 넓은 곳에서 ‘3선 개헌 결사 반대’라고 고함 지르고 사람들 몰리면 골목길에서 술을 먹고, 또다시 거리로 나가고 그랬죠.

-YS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포항에서 형이 운영하는 동해제강에서 5년간 근무했어요. 그곳에서 일에만 집중했어요.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길래 ‘이건 아니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회사도 부도가 났어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민주화 투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원래 아버지가 민주당 신파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는 게 맞지만 당시에는 이미 지역 갈등이라는 벽이 생긴 때였어요. 자연히 경남중학교 선배인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갔어요. 김용주 의원 아들이라고 하니깐 반겨 주셨죠.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이 되고 재벌집 아들인 나를 보호해 줘야 되기 때문에 김덕룡 실장을 통해서 김 전 대통령에게 말을 전달하게 했었죠. 그리고 몰래 민추협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 다음에 6.15 선언이 있고,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었죠. 민추협 사무실, 통일민주당 당사를 저의 이름으로 사기도 했어요.

-통일민주당 당사와 관련된 일도 비화 하나만 말해 달라.

전두환 정권 말기에 '친위 쿠데타' 설이 있어 야당을 쓸어버리고 다시 정권을 연장하려고 하자 그때 ‘죽었다’라는 생각 뿐이었어요. 독재 세력이 가장 먼저 탄압하는 게 금전적인 것이었니까요. 때마침 중도금을 주는 시점이었거든요. 이때 김 전 대통령과 김덕룡 실장을 만나 이 사태를 두고 논의를 했어요.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의 결론은 간단명료했어요. '언제 돈 보고 살았냐? 돈 줘 버려라'고 해서 중도금을 줬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선배들 얘기 들어보니 '일단 도망가라. 안 그럼 주변이 다 죽는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결국 나 혼자 죽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술을 먹고 기록을 모두 없앴어요. 결국 쿠데타는 안 일어나고 항복 선언이 나왔죠.

-김 전 대통령을 모시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그 시절에는 내일이 없었어요. 밤길을 가도 모든 것을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일념 하에 서로 의기투합하고 그 목표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은 절대적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의심 받지 않았어요. 그러나 최근 정치권은 더 좋은 일을 위해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서 오는 괴로움이 너무 힘들어요.

-박근혜 전 대표와도 ‘환상의 콤비’였는데?

박근혜 전 대표는 내가 사무총장으로 일할 때 당대표로 같이 일했죠. 그때 무척 콤비가 잘 맞아 2005년 재보선에서 ‘40대0’의 신화를 만들었죠. 그때 당에서 공천을 3번 정도 했는데, 박 전 대표와 나는 공천심사위원들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죠. 또 그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죠. 적자 보는 당을 흑자로 만들었고, 사이버 정당 순위에서 꼴찌하던 걸 1위로 만들었죠. 천안연수원의 국가 반납도 그때였고요.

당 분위기를 일하는 분위기로 쇄신했는데, 정작 대권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 대신 이명박 전 서울시장(현 대통령)이 최종 후보로 결정됐죠. 그래도 박 전 대표와 인연을 계속 이어갔죠.

-이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한나라당이 웰빙당, 기득권 세력이라고 하는데 사실 한나라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졌어요. 나는 그 중 통일민주당 창당 멤버고. 그래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실하지.그런데 좌파 정권 10년 동안 정권 창출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더니, 우릴 잘랐잖아.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래서 ‘싸워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무소속 출마했죠. 선거 중반에는 이길 수 있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후에는 재입당 과정을 놓고 무수히 싸웠고요. 결국엔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입당할 거고, 과거는 덮자’고 화해했죠. 오직 이명박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국책 사업과 관련해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은데

이런 결과를 예측하는 게 정치죠. 몇 조가 들어가는 국책 사업을 공모를 통해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공모를 하겠다는 것은 결국 경쟁하는 건데, 그러면 싸움이 붙어요. 사업 정보는 정부가 다 갖고 있잖아요. 결국 정부가 어디에 투자해야 효율적인지 알고 있다는 거죠. 그럼 정부가 선정위원회 만들어서, 딱 발표하면 그만인 거지. 그걸 질질 끌면서 물러 터지도록 놓아 두고, 지금 발표하니깐 반발하는 겁니다.

나는 이런 문제를 병리적 현상이라고 보는데, 수도권 충청권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죠. 근데 3조5천억원짜리 국책 사업이 또 충청으로 가니. 하지만 공약이잖아요. 어쩔 수 없지만, 보내야죠. 하지만 연구 단지나 가속기 정도는 충청에 주고 연구단은 다른 지역으로 분산 배치하는 게 맞습니다.

-원내대표라는 짐을 벗었다. 앞으로 행보는?

일단은 쉬고 싶습니다. 그동안 소홀했던 지역구도 관리해야 하고, 건강도 챙겨야죠. 그리고 이후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나의 모든 걸 걸 겁니다.

<사진=배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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