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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의 능 |
681년 8월 서라벌에 난리가 났다.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고, 창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군까지 몰아낸 다음이라 난리는 끝인 줄 알았는데, 대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난리가 난 것이다. 김흠돌의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다. 누구는 흠돌이 인명전군을 왕으로 세운다고 했고, 누구는 김흠돌이 왕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였고, 그의 딸은 태자비였다. 서라벌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난을 일으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8월 8일 오기공(<<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아버지)에 의해 난이 진압되었고, 흠돌 일당은 처형되었다. 그제야 백성들은 문무왕이 붕어한지 알게 되었다. 김흠돌은 문무왕이 위중해지자 군대를 서라벌로 불러 모았고, 왕이 붕어하자 이를 비밀에 부치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흠돌의 난이 진압되고 즉위한 신문왕은 난에 연루된 이들을 처형하였는데, 병부령 군관까지 처벌하였다. 군관은 고구려 병합과 백제 부흥 운동 진압에 공을 세운 장군이었고 풍월주과 상대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는 흠돌 일당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나 집이 포위되었기에 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신문왕은 그가 흠돌의 반란 계획을 그가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처벌하였다.
처벌된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군관과 같이 대신라를 건설하기 위한 전쟁에 공을 세운 공신이거나 그 후예들이다. 신문왕은 이 난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정치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숙청하였다. 이를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신라 전제왕권의 성립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은 김흠돌의 삐뚤어진 ‘외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흠돌은 보룡(오기공의 고모)과 선품의 딸인 자의에게 한 눈에 반해 버렸다.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고 하다가 보룡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보룡에 관해 나쁜 소문을 내고 그녀를 위협하였다.
또 자의가 태자비(나중에 문무왕비)가 되자, 자의에 관해서도 험담을 하였다. 보룡과 자의는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흠돌이 김유신과 문명후(문희)의 조카였기 때문에 가슴만 졸이고 있었다.
위협과 험담으로도 성에 안 찼는지, 흠돌은 자의가 왕후가 되었을 것을 염려해 유신의 딸 신광을 태자의 첩으로 궁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문무왕이 즉위한 다음에는 문무왕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정명태자(후에 신문왕)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고, 선명궁주를 총애하여 이공전군을 낳았다. 선명궁주는 흠돌의 이복형제인 김흠운의 딸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흠돌의 배경이 되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이 세운 공(功)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졌다. 반면에 흠돌이 자신의 배경을 믿고 자행했던 악행은 점점 불어나 있었다. 마지막 배경이었던 사촌형제 문무왕마저 붕어하자 김흠돌은 난을 일으켰다. 신라 사회는 근친혼을 하였기 때문에, 거미줄처럼 얽힌 인맥을 가지고 있다. 흠돌을 도왔던 돕지 않았던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인맥의 거미줄을 따라 김흠돌의 난의 관련자로 처형되었다. 흠돌은 자신은 물론하고 자신과 관련 있던 모든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자의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의 거절에 쉽게 마음을 접었더라면, 험담과 위협으로 분풀이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악행이 자의로 인해 드러난 것뿐일까? 흠돌이 나쁜 사람인 것을 자의가 알아본 것일까?
본래부터 나쁜 사람이 있을까. 나쁜 인연만 있을 뿐이다. 흠돌과 자의의 관계는 외사랑으로 시작해서 반란으로 끝났다. 잠시 속만 끓이다 말았으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었을 수도 있었을 사랑이 외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에 대한 집착과 분풀이로 외사랑은 악연이 되었다. 그 악연으로 인해 흠돌은 자신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던 김유신과 문명후에게 역적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쓰게 했고, 자신을 따랐던 화랑과 낭도, 군사에게는 반란군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안겨주었다.
[조경란 ㅣ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