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남·정진이기자] "예, 어머니 저 해진인데요, 뭐 좀 여쭤볼게 있어서요…"
조해진 의원(밀양 창녕,47)은 인터뷰 초반 그의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을 차분하게 조용조용히 물어보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었다. 말이나 몸짓에 자신감이 넘쳤던 여느 의원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마치 0.5배 느리게 작동하는 버튼을 눌러놓은 것처럼 천천히 느긋하게 말을 했다. 현역 국회의원 중에 말을 느리게 하는 걸로 꼽으면 빅3 안에는 무난히 들 정도였다. '이 의원이 불과 몇달 전까지 한나라당 대변인직을 수행했던 바로 그 사람인가'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결론적으로 조 의원과의 인터뷰는 '대변인이라면 화려한 언변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는 생각을 '편견'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겸손과 희생'의 리더십을 지향하고 '소통의 통로'가 되려 노력하는 조 의원.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봤다.
자전거 행상 아버지 그리고 가난, "집 어려웠어도 꿈 많은 문학소년"
어린 시절 조 의원은 ‘떠돌이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고물상이 실패해 행상을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래서일까. 조 의원의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하다. 밀양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밀양으로 이사를 다녔던 것이 기억의 전부다. 결국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얘기를 물어봤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과일행상, 밀양에선 구두행상을 하셨다고 하네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농토를 한 300평정도 빌려서 농사도 지으셨는데 세내고 나니 남는 게 없었나봐요. 결국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시골장으로 나서야했어요.”
조 의원은 6살 이전까지 이사만 4번을 넘게 다녔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운영하던 고물상이 망하자 먹고 살기위해 행상을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어린 조 의원은 기억조차 희미한 그 시절, 밀양에서 서울로 다시 밀양의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과일 행상을 하셨었고, 밀양에서는 구두행상을 하셨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농토를 한 300평 정도 빌려서 농사도 지으셨었는데 세 내고 나니 남는 게 없어 결국 다시 시골장으로 나서야 하셨죠. 식구들 부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어려운 가정 형편 가운데 조 의원은 책에서 즐거운을 찾았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책을 빌려와서 읽을 정도였다. 그는 국어와 사회 교과서도 즐겨 읽었는데 명절이면 1,2학년 위의 사촌 형들의 교과서까지도 재밌게 읽었다고 했다. "책 읽는 걸 즐겼을 뿐만 아니라 그 책에 나온 내용을 외우는 것도 좋아했어요. 읽은 책을 친구들한테 가져가서 물어보라고 하고 답도 맞추고 일종의 놀이 같은 거였죠. 그 덕분인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늘 반에서 1등이었어요."
과외도 받지 않았지만 조 의원은 중학교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중학교 전교 1등으로 공립 밀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3년 학비도 면제 받았다. 그 당시 밀양고등학교는 새로운 교장선생님이 부임하며 밀양 시내의 모든 중학교 1~3등까지의 학생들에게 밀양고로 진학할 경우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명문고로의 발돋움에 힘쓰고 있었다. "저로서는 다행이었죠. 3년치 등록금이면 그래도 꽤 큰 돈이잖아요. 제가 그 학교에 가서 학교 홍보지를 보니까 그 해에 가장 성적 좋은 학생이 서울의 D대학에 갔더라고요. 그 때는 정말 서울대는 꿈도 못 꿨었어죠."
언제봐도 책든 자세로 '밀양고 전설', "공부만이 유일한 희망"
조 의원은 전교 6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매달 시험 볼 때마다 점차 등수가 떨어져 1학년 1학기 말에는 전교 34등이 됐다. 집에서 나와 혼자 자취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도 힘이 들었고, 좋은 가정에서 과외도 받으며 부모님의 지지 속에 공부하는 학생들과 비교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 매달 시험을 보면 그 성적을 게시판에 붙여놨었습니다. 계속 등수가 밀려나는 걸 모든 학생들이 다 볼 수 있었죠. 특히 같이 밀양고로 온 동기들과 중학교 선배들이 저한테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상처를 받았던 건 바로 조 의원 자신이었다. 어렵게 살면서 못 먹고 못 가졌어도 공부 잘하는 걸 자부심으로 여긴 그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대학도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떨어지는 성적에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였죠. 공부를 할 것 같으면 죽을 각오로 하고 아니면 아예 그만 두는 것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론은 '다른거 하지 말고 공부만 하자'로 났습니다. 제가 공부를 해서 성공하는 게 저희 집안과 저의 유일한 희망이었거든요."
2학기 때부터는 공부만 파고들었다. 등하굣길, 식사시간은 물론이고, 복도를 걸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항상 책을 보며 다녔다. 누가 언제 봐도 조 의원은 항상 책을 든 자세여서 당시 밀양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녔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됐다. 노력은 2학년 1학기부터 전교 1등이라는 성적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남들이 봐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했어요. 그래서인지 학교에 향학열이 불타올랐죠. 저 따라서 책 들고 보면서 다니는 친구들도 생겨났어요. 나중에 동기모임 나가니까 '너 덕분에 그 때 공부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웃음)"
6,7개 아르바이트했던 서울대 시절, "나경원 의원은 동경의 대상"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정신으로 공부한 덕에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는 '급'이 다른 동기들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 잡혔다. 집안, 머리, 옷차림 하다못해 자신감에 넘치는 성격까지 조 의원에게 없는 모든 걸 가졌기 때문이었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접근이 안됐어요. 대화 소재도 별로 공통점이 없었고 그럴 경제적 여유도 없었죠. 가장 부러웠던 친구는 단연 나경원 의원이에요. 그 때부터도 무척 주목 받는 친구였거든요."
조 의원에게는 열등감 조차도 사치였다. 당장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집안 식구들에게 부칠 돈까지 해결해야 했던 탓이었다. 주말 같은 때는 아침 7시부터 저녁 12시까지, 그야 말로 아르바이트로 날이 새는 때가 허다했다. 조 의원은 당시를 추억하며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참 희한하게도 저는 과외를 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렸어요.(웃음) 소개받는 학생들 집안 형편이 다 그저 그런 애들이었거든요. 동기들이 과외비로 받는 돈의 3분의 1정도 밖에 못 받아서 남들 1개할 거 저는 2~3개씩 했었습니다."
형편이 그렇게 어려웠다면 진로를 고민할 때 대기업이나 공무원을 생각했어야 했지만 그는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정치인이었다. 지인들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정치를 하냐' '정계에 가서도 너는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조 의원은 한 번 굳힌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제가 미래에 대해 갈피를 못 잡을 무렵 교회 목사님이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 있다'는 설교를 집중적으로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고민한 끝에 불가능해보이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 길이 내 길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죠."

정계 입문 16년만에 국회의원 당선, "소통의 통로 역할이 내 몫"
조 의원은 서울대 법대 대학원 졸업 후, 1992년에 박찬종 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6년 간 박 의원을 수행했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이회창 총재의 보좌관으로 4년을 일했다. 2003년부터 2005년 봄까지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하다가 2005년 5월 서울시장 비서실에 들어가 당시 이명박 시장 비서관, 이명박 대통령 후보자 공보특보로 활약했다. "그 분들을 밑에서 일하면서 '내가 저 자리에 가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정치의 밑그림을 거시적, 미시적으로 그렸던거죠."
차분히 준비하며 기회를 기다린 끝에 그는 정계 입문 약 16년 만에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지난 2009년 9월부터 올해 8월 초까지 한나라당의 대변인직도 맡았다. 여당의 얼굴이자 목소리로 국민들 앞에 선 느낌은 어땠을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대변인이라는 자리가 아직까지는 상대당과 싸우는 역할을 맡아서 해야하는 데 제가 성격이 그렇지 못해서 의원들의 기대치만큼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불만도 좀 듣고 했지만 그 자리에 있어보니 국회 내에서, 국회와 국민들 간에, 또 국회와 청와대 간에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8년 당선 인삿말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한 조 의원이지만 막상 국회에 들어와보니 애로사항이 많았던듯 청와대와 국회 간의 소통의 문제를 지적했다. "청와대도 국회도 서로 돌아가는 싸이클이 다르더라고요. 토론,보고,회의 등도 다 각자 시스템이 있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만나고 회의하는 게 정기적이지 않고 어떤 행사처럼 여겨지는 것도 안타깝고요. 자주보고 생각을 나눠야 소통이 자연스럽게 되는건데 말이죠. 청와대와 국회의 소통이 잘 안되는 건 양쪽 모두의 책임이 큰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가능하다면 이런 부분에서 제가 소통의 통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인터뷰를 마치며 조 의원에게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국민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감성적이거나 충동적 선택으로 정치인을 뽑는 분위기에 대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정치선진국으로 가려면 국민들이 정치인을 잘 뽑아주셔야 합니다. 신중히 뽑고 정치에도 관심을 좀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중요한 정치의 주체인데 선거 이후에 나몰라라 하시지 않으시길 부탁드리고 싶네요. 국민여러분, 한국 정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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