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민 박형남기자]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김진표 민주당 최고위원은 무척 밝은 모습이었다. 재보선 승리 탓인지 한결 여유가 묻어 나왔다. 지난 4월
그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에 대한 입장을 유보했던 것과 달리 “당에서 필요로 한다면 무조건 출마하겠다”고 못 박았다. 출마배경을 설명하면서는 야당 의원다운 투쟁적인 면모도 보였다. 부총리를 두 번 역임하고 민주당의 대표적인 정책통이자, 수도권의 리더로 떠오른 김 최고위원을 지난 17일 의원회관에서 만나 진실토크를 나눴다.
'아찔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인민군, 첫 진격지는 우리 동네"
김 최고위원의 어린 시절은 베일에 싸여 있다. 홈페이지를 살펴봐도 부모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사실 김 최고위원의 어린 시절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아찔한 추억’ 뿐이다. 전 가족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던 숨 가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38선 바로 밑 경기도 연백군 은천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이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최고위원은 6.25전쟁이 발발하던 당일 북한 인민군이 뒷산으로 내려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산불이 났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산불’이 아닌 ‘인민군 빨간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동네가 첫 번째 진격지였어요. 충돌은 없었는데, 무조건 밀고 내려오는 탓에 1분 1초가 다급해 아버지가 파출소장인 고모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어요. 두 분이 ‘이대로 있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에 급한 대로 집 부엌에 숨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1년간 먹을 양식, 땔감(나무)을 쌓아 놓은 부엌에 꼭꼭 숨었던 아버지와 고모부. 그런데 인민군은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쌓여 있는 땔감에 따발총을 쐈고, 실하게 쌓여 있는 두 번째 땔감에는 착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이제 들켰구나!”라고 생각했던 김 최고위원. 그런데 빠른 시간에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인민군은 “빨리 점령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버지가 숨어있는 곳을 끝까지 뒤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인민군에게 “어제 밤 미리 알고 도망가셨어요”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죽음을 피한 이후 김 최고위원의 부친은 방공호를 파고 서울 수복 때까지 숨어 살았다. “처음엔 1~2달 있다가 끝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수복 때 중공군이 넘어와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면장’ 경험을 바탕으로 하급 공무원 생활을 하셨죠.”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책꽂이에 꼽기 전 30분씩 예습,복습했다"
3남 1녀 중 장남인 김 최고위원은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평소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 작은 부자는 본인이 만드는 것"이라며 "부지런하면 입에 거미줄 안치고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근로에 대한 기쁨도 가르쳐줬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식들에게 한 사람 앞에 2~3평 밭을 주셨어요. 심고 싶은 걸 심으라고 하셔서 친구들과 함께 배추, 감자, 고구마를 키웠어요. 추수 때마다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의미를 어린 나이에 깨달을 수 있었죠.”
이른바 ‘애늙은이’였던 김 최고위원은 학창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으로 활동하며, 수원중학교-경복고를 진학할 때도 ‘전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김 최고위원은 “남보다 특출나게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다”며 “좋은 공부 습관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김 최고위원이 말하는 ‘좋은 공부 습관’은 무엇일까.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거죠. 등교 후 책가방을 팽개치고 놀러가는 것보다는 가방을 정리하면서 그날 배운 것을 한 번 훑어본 후 책꽂이에 꼽았어요. 그리고 친구들과 뛰어놀고도 잠 들기전 다음날 배울 책을 반드시 정리하면서 예습을 했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요. 각각 30분씩만 하면 되죠. 그러면 수업에 집중할 수도 있고, 선생님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고딩시절 '중3 전문 가정교사'로 등극…"장관 등의 자제도 과외시켰다"
김 최고위원은 고등학교 시절 수원에서 서울로 유학 오면서 자의반 타의반 가정교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접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신통치가 않았다. 결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과외 대상이 중3이었는데, 이후 ‘중3 전문 가정교사’로 고교입시 시장에 이름을 날렸다. 성북동 등 서울 부자동네에서 가정교사를 했던 그는 어린나이에 ‘거래(?)’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고등학교에 입학과 함께 들어간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중3학생을 키우고 있었어요. ‘수석입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저에게 거래(?)를 제안하더군요. ‘자기 아이를 경복고에 보내고 싶으니 아들과 같이 하숙방을 써라. 그럼 하숙비를 안받겠다’는 게 골자였어요. 결국 그 학생을 맡았고 성실하게 가르쳐준다는 입소문이 퍼져 대학교에 갈 때까지 가정교사를 했죠. 서울 성북동 입주 가정교사는 물론 장관, 재벌들이 모여 사는 동네까지 발을 뻗혔을 정도예요. 이 때문에 기억에 남는 제자들도 많아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임했던 A씨의 아들도 제 직계제자지요.(웃음)”
‘입소문’ 때문에 김 최고위원에겐 과외 문의가 쇄도했다고. 연합고사 입시문제를 족집게처럼 잘 맞출 정도로 ‘적중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학생들의 진로까지 결정해줬던 김 최고위원은 ‘족집게 과외선생’에 머물지 않고 ‘진로와 인생의 상담원’가지 겸했다.

문화적 충격에 빠졌던 사연…"비경복중 출신 때문에 차별받기도"
그러나 서울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문화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고교 입시는 동일학교 우대제도로 같은 중학교에서 상급 고등학교 진학한 학생들의 텃세가 심했다. 비록 김 최고위원이 진학할 당시에는 동일교 진학 우대제도가 폐지됐으나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있었다. “성적으로 반 편성을 해야 되잖아요. 수석으로 합격한 저는 당연히 1학년 1반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1학년 4반으로 편성되더군요. 게다가 담임선생님은 ‘타교생은 문화를 잘 모르니 부반장을 하라’고까지 강요했어요. 2학기 때 다시 선거를 하자고 제안, 고등학교 내내 반장을 할 수 있었죠.”
이 때문에 토박이격인 경복중 출신들과 비경복중 출신들로 파벌이 나뉘었다. 비경복중 출신의 리더였던 김 최고위원은 패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불량 청소년'까진 아니지만 '문제아'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학창 시절 내내 1등을 유지했던 성적도 미끄럼을 탔다.
“하숙집은 노는 친구들의 아지트가 됐어요.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는 장소였으니까요. 특히 공부보다는 등산에 관심이 많았고, 담배도 피웠어요. 이런 식으로 반항적 고교생활을 보냈죠. 한 번은 6.3 회담 반대 데모에 나섰다가 크게 다친 적도 있어요. 학교 옆이 청와대였던 만큼 종로경찰서에서 우리 데모를 살벌하게 막았죠. (상처를 보여주며) 그때 경찰이 무릎을 곤봉으로 휘두르는 바람에 상처를 입고 곪아버렸어요.”
6.3 회담 반대 데모 주도로 3개월간 '결석'…"경찰, 한곳만 때리더라"
곤봉에 맞은 상처 때문에 김 최고위원은 3개월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정상적인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백탄 술에다가 물을 데워서 스스로 치료했고, 약을 먹으면서 고통을 참아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었습니다. 수석을 하던 제가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으나 떨어졌으니까요. 허송세월을 보내다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 제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어요.”
담임선생님이 가정 형편을 알았던 탓에 “집에 있어서 공부가 되겠느냐. 서울에 와서 가정교사를 하라”며 서울대 부속 병원 과장 아들을 소개받았다. 결국 이를 수용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문제는 가르쳐야 할 학생이 8대 독자인 친구를 때렸다가 친구가 뇌진탕으로 즉사한 것. 당시 중3이었던 제자는 폭력사건에 휘말려 크나 큰 고충을 겪었다.
“보통일이 아니었죠. 죽은 친구 엄마의 요청으로 한 달에 한번 그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왔어요. 그 후유증으로 제자가 정신질환까지 얻게 됐죠. 그런 그를 추스르기 위해 영화를 보거나 남산에 오르면서 서로의 상처를 씻어주었죠. 그 덕분에 저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 학생도 무사히 고등학교에 진학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있어요.”

진로는 법대, 꿈은 경제 대기자…"막스의 자본론 읽으며 '경제관' 수립"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김 최고위원은 정작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보다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A씨 집에서 입주과외를 하면서 경제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어요. 경제학과 교수였던 탓인지 금서인 경제 서적이 많았죠. 막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 등을 다 읽었을 정도니까요. 이 덕분에 ‘나만의 경제관’을 가질 수 있었고, 경제학 공부에 심취했어요. 심지어 경제 대기자, 칼럼리스트를 하고 싶었으니…. 그런데 불경기로 인해 할 수 없이 언론사에 입사할 수 없어 행정고시를 봤어요. 비록 1차례 떨어졌지만….”
김 최고위원은 대학 졸업과 함께 서울 신탁은행에 입사했다. 4학년 때 처음 본 행정고시에서 낙방한 탓이다. 그러나 은행은 그와 적성이 맞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하고 나왔다. 김 최고위원은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행정고시를 준비한 후 행정고시 13회에 합격해 국세청 소비세과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부임한 영월세무서장직은 김 최고위원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김 최고위원은 인사발령과 함께 온 가족이 영월로 이주했다. 당시로는 드문 일이었다. 현장에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동분서주하고 재무부 발령을 받고 떠나던 날, 영월지역 유지를 비롯한 주민 수백 명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배웅을 나왔다. 김 최고위원은 영월군이 선정한 명예군민 1호로 영월과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공무원들의 모범담안' 김진표 최고위원…"언제 어디서든 준비된 공무원"
김 최고위원의 공직생활은 화려했다. 그의 행동하나하나는 ‘공무원들의 모범답안’이었다. 비결은 무엇일까. 김 최고위원은 학창시절 '예·복습'을 철저히 했던 것처럼 무엇보다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상급자의 위치에서 업무를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정한다음 대안을 늘 고민했다. 최종 보고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준비했다. 어떤 지시가 내려와도 곧바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윗사람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일 잘하는 공무원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공무원 김진표’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한다. 굳이 인사 청탁할 필요도 없었다. 에피소드도 많다. “‘국세심판원 사무관으로 일하는데, 본부 세제국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세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는데 심판원장이 6개월만 더 근무해달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알겠다’고 했는데 결국 제 인사 문제로 국세심판원장과 세제국장간에 싸움이 붙었어요. 두 사람 앞에서 제 의사까지 물어보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6개월 후에 세제국으로 갔죠. 처음에는 소득세 계장으로 자리를 주기로 했는데, 억한 감정 탓인지 한직인 주세계장으로 저를 보내버리더군요.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웃음)”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재무부 중심으로 진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직이었던 주세계에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민원이 내려 온 것이다. 발단은 향토주 문제였다. "김재규 정보부장 고향이 안동인데, 안동 노인분들이 김 부장에게 '안동소주' 활성화를 여러 번 건의했어요. 김 부장이 직접 차관에게까지 전화했지만 해결이 잘 안됐습니다. 어느 날 김 부장이 대노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이 문제를 종합 보고하도록 지시가 내려왔어요. 마침 과장이 자리를 비우고 연락이 되지 않아 전날 저녁 제가 불려갔죠.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조사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를 새벽같이 올렸습니다."
김 최고위원은 주세계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언젠가는 써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향토주 과세 문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잘 정리된 향토주 파일을 서랍에서 꺼내 2시간 만에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새벽 조찬 때 보고 했고, 만족한 결과를 얻었는지 흡족해 하시더군요. 자리를 비우고 야구장에 갔던 과장은 혼날 각오를 하고 출근했는데 뜻밖에도 칭찬을 받았으니…. 다음날 국장이 회식을 제안하고 '그동안 잘못했다'고 말하더군요. (웃음)”

'국민의 정부 말기' 정책기획 수석 역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도 때문"
재무부 터줏대감으로 근무하던 그는 동기 중 가장 앞서 국장 등 주요 요직에 오른 후 국민의 정부에서 재경부 차관으로 발탁됐다. 그런 그에게 국민의 정부 말기 대통령비서실에서 정책기획 수석 제의가 왔다. 그러나 함께 일을 했던 진념 장관을 비롯한 선후배, 심지어 가족까지도 반대하고 나섰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비리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정권 교체가 확실시 됐던 만큼 그의 청와대행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장관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고심 끝에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선비의 도리’를 다하자는 생각에서 청와대 수석을 수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도 결정의 주요 이유였다. 그곳에서 월드컵 총괄지휘를 맡아 성공적으로 과업을 완수하고 국민의 정부 임기 6개월을 앞두고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대통령선거 실무를 챙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노 전 대통령에게 김진표 국무조정실장을 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 잘하는 공무원"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이 노 대통령에게 천거한 공직자는 김 최고위원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최고위원은 참여정부에서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교육부총리를 역임하며 참여정부 국정 운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때 공직자든 정치인이든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웃음)항상 대의명분에 맞는 선택을 해야 되고, 길게 보면 내 판단이 옳았구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경험을 전수해서 성공한 사람이 많아요. 이용섭 의원도 그 중의 한명이지요.”

정동영 의원 권유로 정치권 입문…"참여정부 성공 위해 출마 결정"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정동영 의원으로부터 참여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수 의석이 필요하다는 제의를 받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입문을 결심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과 결별한 후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지만 적은 의석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본래 정치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정 의원이 ‘윤덕흥 부총리는 당 표를 늘리기 위해 대구로 출마를 했는데, 김 부총리는 어디를 나가도 승리할 수 있어요. 김 부총리가 안나가면 누구랑 정치를 합니까’라는 말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했죠. 노 전 대통령에게 은혜를 입었던 만큼 ‘참여정부 성공’을 위해 출마를 결정하게 됐던 거죠.”
경제는 30년 관료로 근무…'하고 싶었던 일은 교육개혁'
정치에 발을 들였지만 과거의 행적은 속일 수 없는 법. 교육부총리를 지냈던 김 최고위원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며 경제와 교육문제를 접목해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김 의원은 사실 경제 전문가 못지않게 교육 문제 전문가이다. 경제부처에 있으면서 인적자원에 대한 교육훈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육에 관한 토론그룹을 만들어 7~8년간 운영했다.
"그때 많은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역대 교육부총리에게도 참고하라고 다 보냈죠. 그걸 가지고 노 전 대통령과 수차례 토론했습니다. 그래서 노 대통령도 교육에 대해선 일가견을 갖고 계셨죠."
김 최고위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경제 관련 상임위가 아닌 교육위에서 줄곧 일해 왔다. "경제는 30년 관료로 근무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했어요. 때로는 성공도 하고 실패도 했지만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가장 문제가 많은 곳인데, 개혁이 안되어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김 최고위원의 요즘 관심사는 수도권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경기도 등 수도권이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얘기는 경기도 지사 출마 문제로 이어졌다. 그는 “제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출마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경기도가 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자원도 다양하고 특별히 중요한 곳입니다. 경기도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G7에 들어갈 수 있어요”라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경기도지사 출마 공식 선언…"경기도 30년 후 미래상 세우고 싶다"
“대통령 지망생들이 거쳐 가는 과정이다 보니 현재 경기도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이 살아나지 못한 채 정책이 단절되어 있어요. 제가 할 일은 오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도에 많은 전문가들을 만나 10~30년 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세우고 싶습니다.”
수도권 규제 완화에 대한 김 의원의 입장은 확고했다. “경기도가 아니면 투자가 어려운 분야가 있어요. 고부가 가치 첨단업종이 그렇죠. 여기에는 첨단 엔지니어 전문가들이 필요해요. 그 사람들은 지방으로 갈 경우 대부분 해외로 가버립니다. ‘LG필립스 공장’이 구미에서 파주로 이전한 것 역시 그곳에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온 거예요."
그는 고부가가치 산업 유치를 통한 수도권 활성화 방안을 제시한 그는 지방발전과 연계한 수도권 문제 해결책을 제시했다. "지방에서도 잘 할수 있는 분야가 수도권에 남을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부동산 투기를 노린 것이죠. 수도권이 아니면 안되는 분야에 한해서만 수도권에 남겨야 된다고 봅니다. 즉 경기도가 동북아의 중심이 되고, 수도권은 G7으로 이끌고 나갈 기관차나 마찬가지인 셈이죠. 이러한 것이 바로 바람직한 경기도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최고위원은 오는 30일 3시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경기도지사 출정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다.
|
⊙ '보고서 달인' 김진표 최고위원이 말하는 보고서 작성 요령 |
|
보고서 작성 능력은 공무원들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기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원들에 따라 보고서 작성 요령도 가지각색이다. 대표적으로 보고서의 기본 취지를 잊은채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보다 감정을 앞세울때도 적지 않다. 상대를 자신과 같은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즉 ‘자신의 입맛대로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는 보고서가 아니라는 게 김진표 최고위원의 말이다.
공무원 시절 ‘보고서 달인’으로 통했던 김 최고위원은 보고서를 작성하는데도 요령이 있다고 한다. 최종 보고자의 수준, 한 장에 모든 내용을 집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김 최고위원이 전수하는 ‘보고서 작성 요령’을 알아봤다.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고할 사람이 누구인가’다. 최종 보고자의 정보와 전문성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일례로 대통령이 최종 보고자일 경우 무엇보다 장.차관이나 국장의 정보 수준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때 장관에 대한 취재가 선행되어야 한다. 장관에게 ‘이런 점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등 미세한 부분까지 물어보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보고서다운 보고서가 작성된다는 게 김 최고위원의 경험이다.
‘작성자의 지식수준’도 중요하다. 최종 보고자와 작성자의 지식수준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최고위원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다면 최소한 과장이나 국장이 써야 된다”며 “그래야만 정보수준이 같다”고 조언했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공무원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부분은 중언부언이다. 자신의 지식과 정보에 도취해 초점 없이 내용을 반복한다. 대통령, 장관 등은 늘 잘 정리된 보고서만 읽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이미 보고했던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보고내용이 헷갈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수 있다. 김 최고위원은 “보고서 1장정도의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상급 공무원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의할 사항이 적지 않다. 김 최고위원에 따르면 1장 정도의 보고서를 작성할 경우 핵심 포인트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리적 비약이 많아져 깔끔한 맛이 떨어진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제목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야 된다는 것이 김 최고위원의 제언이다.
김 최고위원은 “보고서가 급한 공무원은 대략 제목 3줄만 봐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며 “공직 업무의 태반이 보고서 작성인데, 간결하고 상급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보서를 쓰는 연습을 한다면 ‘보고서의 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사진=이호준 기자>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