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마다 똑같은 약속이 돌아온다. 재탕, 삼탕, 심지어 사탕. 어차피 찍을 당이 정해진 곳에서 공약은 더이상 당선의 조건이 아니었다. 유권자를 설득하는 '도구'여야 할 공약(公約, 실행할 것을 약속)은 공약(空約, 헛된 약속)이 된 지 오래다. 지역 현안은 달라졌는데도 공약은 이름만 바꾼 채 반복되고, 이행 여부를 따져 묻는 과정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더팩트>는 6·3 지방선거 후 전남·대구·경북 광역의원 후보 공약을 전수 분석하고, 수천 장의 공보물을 뒤졌다. 지역 유권자와 전문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 기록을 5편의 기획 '돌돌공-돌고 도는 공약'에 고스란히 담았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서다빈·이하린 기자] 선거 때마다 비슷한 공약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두고 정치권과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정치권은 교통·복지·농업 등 지역 현안이 장기간 해결되지 않는 만큼 공약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반면 전문가들은 정당의 공천 방식과 정책 개발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기존 공약을 답습하는 관행이 굳어졌다고 지적한다.
이번 지방선거 당시 호남 지역 캠프에 파견을 다녀온 한 더불어민주당 캠프 관계자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지역 현안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같은 공약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교통·복지·청년 정책처럼 주민들의 요구가 지속되는 분야는 선거 때마다 다시 등장하고, 대부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라 장기간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유권자 입장에서는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보다 실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며 "소수정당이 먼저 제기한 의제라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거대 정당이 공약으로 채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경북 지역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했던 국민의힘 관계자 역시 통화에서 "하나의 공약이 완전히 이행되기까지는 통상 4년 이상 걸린다"며 "같은 공약이 반복된다기 보다는 기존 공약을 보완하고 고도화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현안의 장기화'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후보 검증과 공천 과정이 부실하다 보니 공약 준비 역시 성의 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한 지역 공천관리위원을 맡았던 의원은 "공천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지역 유지 같은 사람들은 자기 공약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며 "면접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도 당론이나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고 말했다.
지역 유권자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다. 지난달 25일 전남 곡성역에서 만난 장모(40대·여) 씨"는 공사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 먹는다. 아는 사람들끼리 입찰을 한다"며 "군민들은 그 사람들의 잔치에 들러리가 된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곡성 옥과터미널에서 만난 민주당 당원 박모(40대·남) 씨는 "광역의원에 나오는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다. 지역에서 유지하던 사람들이 (초선) 가선점까지 받으니까 준비 안 된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며 "어디서 본 공약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소수정당들은 저마다 차별화된 공약을 준비했지만 거대 양당 중심의 선거 구도 속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먼저 제시한 정책이 시간이 지나 거대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공약으로 확산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서영 기본소득당 대변인은 통화에서 "지방선거일수록 지방의회와 지방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가져갈지가 주민 삶에 직결되는 선거인데, 언론의 관심은 '격전지'에만 몰렸다"며 "지역에서 갖가지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소수정당에는 참 어려운 선거였다"고 말했다.
진보당 관계자도 통화에서 "광역·기초의원 선거는 토론회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며 "제대로 된 정책 경쟁 조성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부터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혁신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거대 정당도 어차피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정책 개발에 충분한 공을 들이지 않고, 소수정당이 먼저 제시한 정책을 큰 틀에서 가져오거나 표현만 일부 바꿔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며 "선거가 결국 공약만으로 치러지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다만 이들 모두 공약이 다른 정당으로 확산되는 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정책이라면 정당을 넘어 채택되는 것은 정책 경쟁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당은 공약 확산에 대한 '사명'을 갖고 있다. 진보당 관계자는 "우리가 개발했지만, 전체 사회 발전을 위해 확장되면 좋다고 생각한다"며 "버스 공영화나 지역 공공 재생에너지 등의 공약은 더 확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부연했다. 노 대변인 역시 기본소득 공약과 관련해선 "전국에 정당은 달라도 기본소득을 공약한 후보들이 많아지는 것도 우리 당의 과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돌고 도는 공약'의 원인을 후보 개인의 성의 부족보다 정당의 공천 방식과 정책 개발 시스템, 지역 정치 구조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로 진단했다. 지역 현안을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후보를 체계적으로 검증·육성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한 선거 때마다 비슷한 공약이 반복되는 악순환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약은 반복될 수 있지만 검증되지 않는 공약의 반복은 또 다른 문제다. 전문가들은 결국 유권자가 공약의 새로움보다 이행 여부를 평가하고, 정당 역시 후보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의 정책 개발·검증 시스템을 갖출 때 비로소 '돌고 도는 공약'의 악순환도 끊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철현 경일대 특임교수 겸 정치평론가는 통화에서 "광역의원이나 단체장이 되더라도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공약인데도 마치 그 권한이 생기는 것처럼 허풍 공약을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그럼에도 유권자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니 4년이 지나도 그 공약은 여전히 '써먹을 수 있는' 공약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방에서 정치인들을 미리 양성해 당에서 활동시키며 인지도를 쌓게 해야 하는데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당협위원장이 자기 필요한 사람을 공천해 버린다"며 "결국 정당이 제대로 못 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약 개발 과정도 문제로 꼬집었다. 김 교수는 "홍보물 제작 업체에 공약을 맡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며 "제작 업체가 여러 후보 공약을 훑어보고 '베껴 오는 방식으로 만들다 보니 후보 간 공약 차별화도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당은 국고보조금의 30%를 정책에 쓰게 돼 있다. 정책연구소나 지역 조직을 활용해 광역 단위 정도는 정당 차원에서 큰 틀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지금은 후보 개인이 알아서 하는 구조"라며 "정당이 1년 전부터 선거 관련 정책 어젠다를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늘 안 돼 있다. 후보자들이 벼락치기를 할 수밖에 없고, 결국 비슷한 공약을 끌어모아 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소수정당 정책 담당자는 공약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더팩트>에 "정당 차원에서 신규 공약을 일정 비율 이상 포함하도록 하는 내부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지난 선거에서 제시한 공약의 이행률과 남은 과제를 함께 공개하는 방식으로 공약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주민들과 몇 차례 간담회만 열어도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는 충분히 발굴할 수 있다"며 "지역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공약 발굴위원회를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