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마다 똑같은 약속이 돌아온다. 재탕, 삼탕, 심지어 사탕. 어차피 찍을 당이 정해진 곳에서 공약은 더이상 당선의 조건이 아니었다. 유권자를 설득하는 '도구'여야 할 공약(公約, 실행할 것을 약속)은 공약(空約, 헛된 약속)이 된 지 오래다. 지역 현안은 달라졌는데도 공약은 이름만 바꾼 채 반복되고, 이행 여부를 따져 묻는 과정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더팩트>는 6·3 지방선거 후 전남·대구·경북 광역의원 후보 공약을 전수 분석하고, 수천 장의 공보물을 뒤졌다. 지역 유권자와 전문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 기록을 5편의 기획 '돌돌공-돌고 도는 공약'에 고스란히 담았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서다빈·이하린 기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상대적으로 공약 검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 틈을 타 선거 때마다 비슷한 공약이 되풀이되고, 심지어 다른 후보의 공약까지 재활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팩트>가 2022년과 2026년 전라남도 광역의원 선거 후보자들의 공보물을 전수 비교·분석한 결과 후보들의 공약은 지역 현안을 반영해 새롭게 설계되기보다 기존 약속을 반복하거나 다른 후보의 정책을 차용하는 경우가 곳곳에서 확인됐다.
같은 후보가 4년 전 내세웠던 공약을 다시 들고나온 사례는 물론, 같은 정당 후보끼리 서로의 공약을 사실상 답습하거나 진보당·무소속 후보가 먼저 제시했던 정책을 이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세운 사례도 적지 않았다. 겉으로는 새로운 약속처럼 보였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상당수는 4년 전 지방선거에서 이미 등장했던 정책이었다. 표현만 바뀌었을 뿐 정책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팩트>가 앞서 전수 비교한 내용을 생성형 AI 챗GPT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전남 지역 평균 공약 유사도는 78.7%로 집계됐다. 지역별로는 순천·신안·함평이 각각 83%로 가장 높았고, 여수·영광·완도·장흥·진도·해남·나주·담양·목포·보성은 각각 78%, 곡성은 75%였다. 강진(65%)과 광양(70%)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공약 비중이 높았다.
반복된 공약은 농업·관광·교통·복지 분야에 집중됐다. 2022년 공보물에 등장했던 농민 수당 확대, 청년농 육성, 귀농·귀촌 지원, 스마트팜 조성, 농산물 판로 확대 공약은 2026년에도 농어촌 기본소득, AI 기반 스마트농업, 청년농 정착 지원, 로컬푸드 활성화 등으로 이름만 바꿔 다시 등장했다.
보성·담양·장흥·해남·영광 등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 소득 보전과 인력난 해소 공약이 반복됐고, 여수·완도·신안·진도 등 해양·관광 지역에서는 관광벨트 조성, 체류형 관광, 항만·연도교 건설, 도로 확충 등이 4년 전과 비슷한 형태로 제시됐다.
노인 돌봄과 의료·복지 공약도 '노인복지 확대'에서 '통합돌봄', '방문진료', '24시간 돌봄체계 구축' 등으로 표현만 세분화됐을 뿐 정책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당수의 공약이 새로운 지역 의제를 발굴하기보다 기존 정책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는 데 그쳤다.
순천시 제7선거구에서는 임종기 무소속 후보가 순천대 의과대학 유치, 명문고 유치, 공영주차장 확충 등 2022년에 내놓았던 공약을 2026년에도 다시 제시했다. 신안군 제2선거구에서는 최미숙 민주당 후보가 농수산물 최저 가격 보장과 농어촌 소득 향상 공약을 4년 뒤에도 그대로 내걸었다.

2022년 공보물에 실린 문장이 2026년 같은 후보의 공보물에 그대로 삽입된 사례도 있었다. 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한 진호건 민주당 후보는 △어르신 공공일자리사업 확대 △영농비용 절감 △여성 농업인 농촌생활 환경 개선 등 2022년 공보물에 담았던 공약을 2026년 공보물에도 그대로 실었다.
함평군 선거구에서는 2022년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임용수 후보가 2026년 조국혁신당 소속으로 출마하면서도 무소속 당시 내걸었던 함평만 관광특구 조성, 농산어촌 교육도시 구축, 스마트팜 확대 등 핵심 공약을 대부분 유지했다. '골프대학 추진'은 '국제 골프 교육 타운 및 골프 대학 추진'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정책 취지는 그대로였다.
상당수 공약은 사업 추진 방식이나 재원 조달 계획이 빠진 채 방향성만 제시하는 데 그쳤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 없이 '확대', '지원', '활성화', '추진'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채워진 공약도 많았다.
이번 선거에서 다수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키워드는 AI(인공지능)였다. 장성은 AI 데이터센터와 국방 AI 산업을, 영광은 AI 기반 스마트농업을, 해남은 AI 마이스터고 유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다만 상당수는 기존 산업·농업 육성 정책에 AI를 접목한 수준으로, 새로운 정책이라기보다 기존 공약에 최신 용어를 덧입힌 사례가 많았다.
공보물의 완성도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일부 후보는 공약보다 정당 홍보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후보 자신의 정책 설명보다 이재명 대통령이나 정청래 전 민주당 대표, 조국 전 혁신당 대표 등 자신이 소속된 정당 지도부와 함께 찍은 사진, 당 경력 소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사례도 있었다. 공약 항목이 아예 없거나 오탈자가 다수 발견된 공보물도 적지 않았다. 일부 후보는 공보물 자체를 제작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면 차별화된 공보물도 있었다. 2022년 광양시 제4선거구에 출마했던 민주당 소속 박경미 도의원은 공약을 단기·중기·장기 과제로 구분하고, 이행 절차와 이행 기간, 재원 조달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공약의 구체성을 높였다.
2026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한 편기석 기본소득당 후보는 농어촌 기본소득 공약과 함께 지급 금액과 재원 마련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특히 재생에너지 공약과 관련해서는 수익을 주민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단계별 구조까지 설명하며 다른 후보들의 공보물과 차별성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공약 반복의 원인으로 정치인의 정책 발굴 노력 부족과 공약 이행에 대한 평가 문화의 부재를 꼽았다. 그러면서 평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 같은 공약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현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최요한 정치평론가는 통화에서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주민들을 만나 청원과 요구사항을 듣고 당선된 다음 날부터 (지역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메모하며 공약을 준비해야 한다"며 "지역이 좁고 의원들끼리 서로 잘 아는 상황이다 보니 4년 전에 사용했던 사진이나 공약을 그대로 내세우는 경우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게으른 정치인들은 어디를 가도 티가 난다.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꾸준히 메모하고 공부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하다"며 "지난 선거 공약이 이행되지 않았다면 왜 안 됐는지 설명하는 과정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도 없이 같은 공약을 반복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