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㊾] 러시아 내 '北 벌목장 탈출 노동자' 귀순 <4>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6.02.08 00:00 / 수정: 2026.02.08 00:00
난제로 떠오른 탈출 노동자 신분 문제
'러 거주권' 소지자부터 우선 처리키로
북·중, '도피자 체포 협력서' 이미 체결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4년 러시아 내에서 발생한 북한 벌목 노동자들의 귀순과 정부의 대책 마련 과정을 당시 작성된 외교 전문으로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4년 러시아 내에서 발생한 북한 벌목 노동자들의 귀순과 정부의 대책 마련 과정을 당시 작성된 외교 전문으로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3편에 이어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4년 4월 20일 외무부(외교부)는 최동진 1차관보를 모스크바로 급파했다. 러시아 현지 공관을 찾는 탈출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신속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외무부 차원에서도 러시아 외무부, 공민권위원회, 외국인등록처 등과 접촉해 측면 지원에 나섰다.

당시 정부가 마주한 난제는 탈출 노동자들의 신분 문제였다. 애초 북한은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여권을 일괄적으로 관리했던 탓에 탈출 노동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국내법적으로 탈출 노동자들은 불법 체류자와 다르지 않았다.

탈출 노동자들이 러시아에 거주권을 신청하고, 여행 허가를 받아 한국으로 오는 방법은 있었다. 다만 거주권 발급을 담당하는 러시아 내무성 주변에 북한 측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외무부는 1994년 4월 25일 대책 회의를 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 따져본 뒤, 이미 러시아 거주권을 획득한 탈출 노동자들의 귀순부터 돕기로 했다. /외교부
외무부는 1994년 4월 25일 대책 회의를 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 따져본 뒤, 이미 러시아 거주권을 획득한 탈출 노동자들의 귀순부터 돕기로 했다. /외교부

이에 최 차관보는 러시아 측에 우리 정부가 발급한 여행증명서나, 유엔난민기구(UNHCR) 및 국제적십자사(ICRC)가 발급한 여행증명서가 있다면 출국 비자를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러시아 측은 "인도적 견지에서 한국 측 결정을 환영한다"면서도 부처 간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탈출 노동자들의 신분 보장에 집중했던 까닭은 러시아의 국내법적 문제 외에 북한이 제기할 수 있는 절차적 정당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우리 정부가 자국민을 납치하고 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최 차관보의 귀국 후, 외무부는 1994년 4월 25일 대책 회의를 열고 실현 가능한 방안부터 따져보기로 했다. 먼저 탈출 노동자들이 러시아 거주권을 취득하는 경우였다. 정부로서는 위장 귀순자를 걸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거주권 획득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북한 측 요원들의 동향도 감지됐던 터라 탈출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도 있었다.

UNHCR과 ICRC가 발급한 여행증명서에 러시아가 출국 비자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됐다. 여행증명서 발급은 UNHCR의 권고만 있다면 현지 ICRC가 제공했던 터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 측도 이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지만, 위장 귀순자나 범죄자 등 신원을 가려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주중 대사관이 보고한 북·중 변경 지구에서의 국가 안전 및 사회 질서의 유지 협력에 관한 의정서 내용. 상대측에 조사·체포를 위탁할 수 있고, 위탁받은 측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체포해 상대측에 인계한다고 돼 있다. /외교부
당시 주중 대사관이 보고한 북·중 '변경 지구에서의 국가 안전 및 사회 질서의 유지 협력에 관한 의정서' 내용. 상대측에 조사·체포를 위탁할 수 있고, 위탁받은 측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체포해 상대측에 인계한다고 돼 있다. /외교부

이에 따라 외무부는 탈출 노동자 가운데 이미 러시아 거주권을 획득한 이들의 귀순부터 돕기로 했다. 러시아 측도 "거주 허가증에 출국 허가 날인만 필요한 문제"라며 반대하지 않았다. 외무부는 이같은 결론 끝에 주러시아 대사관과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거주 허가를 받은 벌목공들은 조속한 국내 귀환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들에게 우리 측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고 주재국이 출국을 허가하도록 교섭해 결과를 수시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중국으로 도피한 탈출 노동자 문제도 해결하고자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 정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중국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는 1986년 8월 '변경 지구에서의 국가 안전 및 사회 질서의 유지 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의정서에는 △쌍방은 주민 불법 월경 방지 업무에 관해 상호 협력한다 △합법적 증명을 소지하고 있지 않거나, 소지한 증명에 명시된 통행 지점 및 검사 기관을 거치지 않고 월경할 경우 불법 월경자로 처리한다 △불법 월경자에 대한 명단 및 유관자료를 상대측에 통보한다 △범죄자에 대해 계속 추적·체포할 수 없을 경우 상대측에 조사·체포를 위탁할 수 있다 △위탁받은 측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체포해 상대측에 인계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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