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신진환 기자] 3박 4일간 이어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지난 주말 종료된 가운데 국민의힘은이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에 제동을 걸겠다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대응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의석수가 열세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과 함께 오히려 민생법안 처리를 늦추는 정쟁의 도구로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이 다수당의 안건 처리에 반대하며 의사진행을 지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국회는 2012년 4월 입법 교착을 타개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재허용하는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필리버스터는 여야 간 입법 갈등을 완화하는 한편 입법의 부당함을 여론에 호소하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22대 국회에서 여야 간 극한 대립이 지속되면서 필리버스터가 정쟁의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다.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가맹사업법에 대한 필리버스터가 단적인 예로 꼽힌다. 첫 주자로 나선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국민의힘은 가맹사업법에 찬성"이라면서도 여당이 추진하는 '8대 악법'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한다고 밝혔다.
나 의원이 말한 '8대 악법'은 '사법파괴법'과 '입틀막법'을 통칭한 것이다. 국민의힘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법왜곡죄 신설법 △공수처 수사범위 확대법 △대법관 증원법 △4심제 도입법을 '사법파괴 5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필리버스터 제한법 △정당 거리현수막 규제법 △유튜버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법을 '국민 입틀막 3대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당은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민생을 방해한다며 날을 세우고 있다. 김병기 원내대표는 1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국민의힘은의 명분 없는 필리버스터 때문에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도 잠시 멈췄다"라고 지적했다. 한정애 정책위의장도 "다음 주에도 2차 필리버스터를 예고한 국민의힘은 민생 외면, 무책임의 끝판왕"이라고 직격했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회법상 필리버스터가 실시되면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서명으로 종결동의를 제출할 수 있고, 그로부터 24시간 뒤 재적 의원 5분의 3(180석) 이상 동의로 토론을 종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포함한 범여권의 의석이 토론을 끝낼 수 있는 만큼, 상정된 법안 한 건만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힘은 책임이 여당에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당 관계자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우리 당이 법안을 발목잡는 것이 아니"라며 "집권여당이 제대로 숙의하지 않은 채 날치기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당이) 야당을 패싱하고 제 멋대로 일방적으로 법안을 처리하려는 행태를 방기하는 것이 오히려 야당으로서 직무 유기"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이 현실적으로 민주당의 입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고 있지만, 일각에선 입법 저지의 목적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여야 간 합의된 법안까지 무제한 토론으로 대응하는 건 과잉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여야 간 이견이 없는 비쟁점 법안 처리가 입법 저지 수단으로 제한적인 필리버스터에 막혀 늦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어서다.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원을 골자로 한 반도체특별법,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해 의료지원을 실시하는 의료기관 범위를 확대하는 국가유공자법, 공연과 운동경기 입장권의 암표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공연법 등 여러 상임위원회에서 여야가 대안을 마련한 법안 60여 개가 본회의에 부의된 상태지만, 이달 하순으로 예상되는 본회의에서 처리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 쟁점 법안을 이르면 오는 21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대응할 방침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또 다시 무제한 토론과 법안 처리의 악순환이 반복될 전망이다. 결국 여야의 양보 없는 다툼에 국민이 피해를 보는 만큼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자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현재 경제가 굉장히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민생법안까지 처리가 지연되는 건 피해야 한다"라며 "매번 각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진행해 다른 법까지 통과가 늦어지는 일은 거대 양당 모두가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