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국회=이하린 기자] 12·3 비상계엄 1년이 지나면서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계엄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 현 87년 헌법 체제가 꼽혔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권력관계를 조정해 삼권분립을 재정립하는 등 시대에 맞춘 개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최소한의 안부터 먼저 처리하는 '단계적 개헌론'을 현실적인 방안으로 제시한다.
지난해 계엄 직후부터 대선 정국까지 87년 체제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꾸준히 제기됐다. 대선 당시 여야 모두 87 체제 종식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 강화를 담은 개헌 과제를 대선 과정 당시 제안했고, 대통령 취임 후에도 국정과제 1호 과제로 개헌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를 논의하기 위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는 아직 구성조차 되지 못하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8월 "9월 말이나 10월 초쯤에 개헌특위를 구성해 개헌안을 성안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비롯해 각종 정치 현안에 밀려 진척이 없다. 여전히 개헌에 대한 이 대통령과 우 의장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이날 통화에서 "최근에 우 의장과 상임고문, 전직 의장들이 함께 만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이 대통령이나 우 의장이 개헌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전했다.

여야도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1948년 제헌 헌법 이후 1987년 9차 개헌까지 39년이 걸렸고, 그 뒤로 현재까지 한 차례도 헌법이 개정되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시대 의식을 헌법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 2017년 국회 개헌특위와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등으로 개헌 논의가 꽃 피웠을 때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진전 없이 흐지부지됐다. 대표적인 헌법학자인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개헌 논의가 길어지면서 각자 다른 의견을 제시하다 보니 여러 갈등이 생기고 있다. 여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정치권의 태도도 문제"라면서 "이재명 대통령 역시 개헌의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고 짚었다.
개헌 논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로 해묵은 여야 갈등이 지목된다. 국민의힘 개헌특위 핵심 관계자는 이날 "민주당이 지금 있는 헌법도 다 파괴하고 있는데 무슨 개헌이냐"면서 "민주당은 이재명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개헌을 논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 여야는 각자의 정치적 계산하에 개헌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의 경우 집권 초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굳이 개헌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고, 야당인 국민의힘은 특검 정국이나 당내 갈등을 수습하는 데 몰두하면 개헌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단계적 개헌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장 교수는 "단계적 개헌론은 전부터 학계에서 나오던 이야기"라며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구성원 간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더 논의하고, 갈등이 거의 없는 부분 먼저 개헌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인호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 교수는 통화에서 "개헌한다고 하면, 국민의 합의가 모아지는 한두 개만 건드려야 한다"며 "예컨대 대통령 단임제를 중임제로 수장하는 방안은 비교적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다만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정치적 이슈가 지나간 지금이 개헌을 논의할 '골든타임'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 개헌안을 만드는 것을 지금 착수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장 교수는 "개헌하기 위해선 국민적 공감대도 얻어야 하고 여야 합의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내년 6월 지선을 목표로 개헌을 준비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본다"며 "국회에서 개헌 특위를 가동해 여야 간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