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상>편에 이어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노스롭 항공사 로비 의혹에 대한 미 하원 청문회가 진행된 뒤, 미 국무부는 한국에 사건과 관련한 검찰 수사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검찰은 1988년 12월 19일 박 전 실장의 처남을 외국환관리법 위반죄로 구속한 상황이었다.
처남이 받은 혐의는 박 전 실장이 노스롭 항공사로부터 받은 625만달러 중 200만달러 외화 수표를 법정 기한 내에 매각하거나 예치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울러 노스롭 항공사와의 판매 대리인 계약 해지에 따라 받은 150만달러를 재미동포에게 보관하도록 해 외환관리법을 어겼다는 혐의였다.
미국 측이 정부의 수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노스롭 항공사가 한국 측에 제공한 로비 규모가 625만달러가 아니라, 계약 해지금 150만달러를 포함한 775만달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 측은 박 전 실장 차남에게 제공된 350만달러를 제외한 425만달러 중 상당액이, 노스롭 항공사에 돌아가 미 정계인사 매수 자금에 쓰였다고 봤다.

이에 1989년 1월 18일 주한 미국대사관은 정부에 "수사 현황을 은밀히 통보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미 하원 청문위원들은 1989년 2월 1일 박 전 실장의 처남과 면담하고 싶다며 방한하겠다는 의사를 주미 한국대사관에 전달했다.
다만 정부는 박 전 실장의 처남 면담과 사건 조사 기록 열람은 "한미 간 사법 공조조약이 없어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현재 수사 중인 상황에서 당사자가 외부인과 면담하는 건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측은 "정식 수사 요청이 '절대' 아니고 공개 가능한 수사 결과 자료를 제공해 주는 범위 내에서의 협조"라며 재차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며 원론적 입장을 유지하기로 했다.
정부의 거듭된 반려에도 미 하원 청문위원 일행은 1990년 1월 15~18일 방한 일정을 통보하며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사건 발생 2년이 지나는 때, 미국의 주요 관심은 노스롭 항공사가 한국 쪽 관계자에게 준 뇌물 중 일부를 다시 받았느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판은 계류 중이지만 최소한의 기소 절차는 끝났기 때문에 수사관 면담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반드시 면담 형식은 아니더라도 별도의 비공식적인 협조 경로는 없겠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정부는 "한미 간 사법 공조 협정이 부재한 상황"이라며 "항소심에 계류 중인 사건에 대해 우리 검찰은 외부 인사와의 면담이 부적절하다고 보고 있다"고 반박했다. 정부의 단호한 입장에 미국 측은 더 이상의 요청을 하지 않았다.

'미국 Northrop사의 대한국 로비의혹 사건'이라는 제목의 해당 외교 전문은 이를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노스롭 항공사와 관련해 350만달러 혐의를 받았던 박 전 실장의 처남은 1989년 3월 외환관리법 위반죄에 따라 징역 3년을 구형받았고, 그해 4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1990년 3월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으로 감형됐다. 국내 언론은 '5공 비리 심판'이 비리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다는 평가를 내렸다.
당시 노스롭 항공사 로비 의혹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확산하는 양상도 보인 바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노스롭 항공사 회장을 만나 F-20 전투기 구매와 관련해 800만달러의 커미션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논란이 일자 전 전 대통령 측은 1988년 6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만남은 사실이지만 구매 여부에 대한 구체적 언질이나 커미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다만 박 전 실장과의 접촉에 따라 F-20 전투기 구매 검토를 지시한 건 맞다고 인정했다.
js8814@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