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㊸] 민관 협력 빛난 '한인 강제 이주' 결의문 통과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5.10.04 06:00 / 수정: 2025.10.04 06:00
한인 강제이주 빠진 '민족 명예 회복'
고려인협회, 러 설득해 결의문 통과
노태우 대통령도 '한러 회담'서 언급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1년 러시아의 피압박 민족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 공포에 한인 강제 이주 사건이 제외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1년 러시아의 '피압박 민족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 공포에 한인 강제 이주 사건이 제외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러시아 공화국은 1991년 4월 26일 피압박 민족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을 공포했지만 '한인 강제 이주 사건'은 따로 적시하지 않았다. 이른바 1937년 자행된 '스탈린 대탄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앞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17만여 명의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추방한 바 있다. 이에 소련 내 한인 모임 '전소 고려인 협회'는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민족원(하원) 내 민족문제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고려인 협회는 민족문제위원회에 △강제 사과 △국가 보상 △한인 자치 지역 선정 등을 골자로 하는 서한을 제출했고, 곧 위원회로부터 해당 권익 문제를 검토하겠다는 답을 받아 냈다.

이를 인지한 정부는 고려인 협회가 명분(명예 회복)과 실리(한인 자치 지역 확보)를 동시에 추진하기보다 각각 나눠서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실리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 소련 해체 후 여러 공화국이 결성됨에 따라 민족 간 갈등이 대두되던 때였다.

하지만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았던 두 문제는 민관 협력에 힘입어 급물살을 탔다. 1993년 3월 31일 관련 결의문이 민족원을 통과한 데 이어, 그해 4월 1일 공화국(상원)의 문턱까지 넘은 것이었다. 당시 소련 해제 이후 러시아는 13개 민족별 결의문을 심의 중이었는데, 한인 결의문이 최초 통과였다.

당시 정부는 한인 강제 이주에 대한 명예 확보와 자치 지역 실현 문제를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민관 협력에 따라 러시아 상하원의 관련 결의문 통과를 이뤄냈다. /외교부
당시 정부는 한인 강제 이주에 대한 명예 확보와 자치 지역 실현 문제를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민관 협력에 따라 러시아 상하원의 관련 결의문 통과를 이뤄냈다. /외교부

정부의 노력도 빛났다. 노태우 대통령은 결의문 통과 전인 1992년 11월 19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가졌던 한러 정상회담에서 관련 언급을 꺼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인 강제 이주 사건을 거론하고 이들에 대한 권리와 명예 회복을 호의적으로 고려해달라고 밝혔다.

이에 옐친 대통령은 한인에 대한 탄압이 러시아에서 규탄됐다며 한국계 러시아인들에게도 '피압박민족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이 여타 민족과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같은 흐름 속에 러시아 상하원을 통과한 결의문은 1937년 스탈린이 자행한 한인 강제 이주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또한 한인들의 정치적 복권, 여타 민족과의 동등한 권리, 자유 등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러시아 영토 내 원거주지로의 자유로운 개별 귀환도 명시했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민족문화 진흥계획 수립과 정착을 위한 특별 신용 공여 계획도 담겼다. 정부는 이에 대해 "한인의 원거주지로의 개별 귀환이 보장된 것"이라며 "주정부 지원이 약속되면서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에 대한 법적 및 재정적 지원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11월 19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한러 정상회담을 가진 뒤 나온 공동성명 일부. /외교부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11월 19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한러 정상회담을 가진 뒤 나온 공동성명 일부. /외교부

다만 결의문이 채택·공표되고 법적 구속력이 부여된 것과 달리 피해 한인들에 대한 조치는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인들의 원거주지였던 연해주 당국은 "이주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야기될 뿐 아니라 연해주 내 민족 간 갈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러시아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 역시 우리 정부에 "결의안의 순조로운 시행에 협조하겠다"면서도 "연해주 당국이 고려인의 대규모 이주를 우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인들에 대한 물적 보상 역시 법적으로는 보장됐지만, 소련 해체에 따른 러시아 내 혼란으로 실현까지는 미지수였다. 실제로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대다수는 별다른 보조금이나 정착을 위한 혜택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993년 10월 4일 러시아 내에선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다.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옐친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도 당선됐지만, 당시 헌법은 소련 시대에 머물러 대통령과 의회 간 권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원적 권력 구조에 따른 내분이 유혈 시위로 번진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로서도 우리 정부에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3년 10월 21일 한승주 외무부(외교부) 장관과 미키타예프 러시아 대통령실 공민권위원장의 대화록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다.

미키타예프 위원장은 "의회에서 피압박 고려인의 명예 회복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된 바 있고 고려인의 문화적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했다"며 "러시아 내 거주하는 다른 소수 민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어 "CIS(독립국가연합) 소속 다른 국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이전하는 경우와 구소련 시절부터 무국적자로 있던 고려인들에 대해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면서도 기존 내용 외에 보상 문제 진척에 관해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js8814@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