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안전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이고 철학이어야 한다
  • 이하린 기자
  • 입력: 2025.09.30 16:05 / 수정: 2025.09.30 16:05
정안태 現 울산안전 대표이사 前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
정안태 現 울산안전 대표이사 前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 /본인 제공
정안태 現 울산안전 대표이사 前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 /본인 제공

최근 정부가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산업현장의 죽음을 ‘불운’이나 ‘사고’로 미화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산업현장에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며,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와 기업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참담하다.

지난 5년간 해마다 800명 이상이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특히 건설업에서만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발생한다. 매일 두세 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가족들은 평생을 눈물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히 안전 장비나 규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전을 ‘기술’의 문제로만 한정해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안전은 기술과 장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안전은 문화이자 철학이고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문화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가치의 총합이다. 한 현장에서 관리자가 규칙을 무시하면 그것은 곧 묵인되고, 시간이 지나 ‘현장의 관행’이 된다. 반대로, 리더가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그 가치가 조직 전체로 확산된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말했듯, 인간은 모방을 통해 학습한다. 안전 또한 강제로 지켜야 하는 규정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습관이 될 때 비로소 정착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안전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다.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을 단순히 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공동체의 근본을 무너뜨린다. 따라서 안전은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비용’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한 최고의 가치로 다루어져야 한다.

산업재해가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히 현장 문제에만 있지 않다. 그 뿌리에는 구조적인 제도와 사회적 인식이 문제의 뿌리다. 첫째, 하도급 중심의 건설업 구조가 안전을 비용 절감의 대상이 되게 한다. 원청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전 관리비를 최소화하고, 하청업체는 생존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둘째, 사고가 발생해도 기업은 벌금 몇억 원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고 다시 입찰에 참여한다. 노동자의 목숨값이 그저 비용으로 계산되는 현실에서 안전 투자가 우선될 리 없다. 셋째, 안전교육은 여전히 형식적으로 이루어져 현장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산재 사고는 언론에 잠시 보도되다가 금세 잊히고, 피해자와 가족들은 고통 속에 방치된다. 사회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안전을 기술 중심의 대응에서 문화와 철학의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영국처럼 기업의 연간 매출액에 비례(1%)해 과징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대기업이 안전을 단순한 벌금으로 치부하지 않고,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또한 반복적으로 산재가 발생한 기업은 공공 입찰에서 제한하거나, 입찰 점수를 대폭 감점해 안전이 곧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더불어 안전교육은 규정 전달에 그치지 말고, 노동자와 관리자 모두가 안전의 가치를 이해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참여형·인문학적 교육으로 변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산재 피해자와 가족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며, 산업재해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사회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산업현장의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제도의 결과다. 나는 퇴직 후에도 안전 컨설팅을 이어가며,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블로그에 매일 안전 칼럼과 인문학 에세이를 쓰고 있다. 나의 목표는 단순히 규정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문화와 철학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처럼 산재 사망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이제 우리는 기술과 장비를 넘어 사회와 제도의 근본을 바꾸는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안전은 생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이며,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국가의 책무다. 우리 모두가 안전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기업과 정부가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때 비로소 '오늘도 무사히'라는 소망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안전은 기술을 넘어, 반드시 문화이자 철학이 되어야 한다.

※ 본 칼럼 내용은 필자의 주관적 시각으로 더팩트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jeb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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