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문서공개] 놓지 않던 대화의 끈…남북기본합의서 채택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5.09.02 10:00 / 수정: 2025.09.02 10:00
20여 년 남북회담史 최고위급 회담
北 "美 철수 시 교류·협력 자연스레"
분과위 설득…7개 합의서 채택·발효
통일부는 2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발효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남북고위급회담 문서 3172쪽을 공개했다. 사진은 1991년 12월 13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고위급회담. 당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통일부
통일부는 2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발효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남북고위급회담 문서 3172쪽을 공개했다. 사진은 1991년 12월 13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고위급회담. 당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통일부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통일부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발효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의 남북고위급회담 문서 3172쪽을 2일 공개했다. 이번 자료는 남북대화 사료집 13권과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 제3권~제6권으로 구성됐다.

세부적으로 △남북고위급회담(8차례, 1990년 9월∼1992년 9월) △고위급회담 준비 실무대표 접촉(2차례, 1990년 11월·1991년 8월) △유엔(UN) 가입 문제 관련 실무대표 접촉 (3차례, 1990년 9월∼11월) 등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 등이 포함됐다.

1차 남북고위급회담은 1990년 9월 4~7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우리 측은 강영훈 국무총리가, 북한 측은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수석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로서는 20여 년 남북회담 역사를 통틀어 가장 최고위급 회담이었다.

우리 측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 8개항 △정치·군사적 신뢰구축 방안 8개항 △남북 간 군비감축 추진방향 5개항 등을 제안했다. 교류·협력과 정치·군사적 대결을 병행하자는 취지였다.

반면 북한 측은 "미군 철수, 핵무기 철거 등 정치·군사 문제가 해결되면 교류·협력은 자연히 추진된다"고 맞섰다. 그러면서 3개 원칙과 3개항 긴급 과제를 내세웠는데,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과 방북 구속자 석방 문제 등이 거론됐다.

이견을 확인하는 데 그친 남북은 1990년 10월 16~1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2차 고위급회담을 열었다. 우리 측은 앞서 북한이 주장했던 3개 원칙(7·4 공동성명 중 자주·평화·민족 대단결 원칙 준수, 북남 공동 이익 우선, 회담 분위기 저촉 행위 삼가)을 수용,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팀스피리트 훈련 문제 등 3개항 긴급 과제를 재차 언급했고, 특히 '남북 불가침에 관한 선언' 채택을 주장했다. 앞서 북한은 1985년 7월 23일 남북 국회회담 예비 접촉 때 불가침 공동 선언 채택을 처음 요구했고, 1988년 9월 19일 남북 국회회담 준비 접촉 당시에도 이를 줄기차게 고집했다. 모두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90년 9월 4~7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1차 남북고위급회담 모습. 남북은 줄곧 이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실무대표 접촉 등을 병행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하게 됐다. /통일부
1990년 9월 4~7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1차 남북고위급회담 모습. 남북은 줄곧 이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실무대표 접촉 등을 병행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하게 됐다. /통일부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선 남북은 3차 고위급회담에 앞서 '실무대표 접촉'을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 측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조문 형식으로 먼저 채택하고, 정치군사분과위원회와 교류협력분과위원회를 발족해 불가침과 교류·협력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북남고위급회담 공동성명 △북남불가침에 관한 선언 △북남협력교류에 관한 선언 등 3개 문건을 별개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 측은 관계 개선 없이 불가침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1990년 12월 11~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3차 고위급회담에서도 양 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북한 측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1991년 2월로 합의한 4차 고위급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 측은 고위급회담 재개를 촉구했고 6개월이 지나서야 '실무대표 접촉'이 재개됐다. 이후 2개월 뒤인 1991년 10월 22~25일 4차 고위급회담이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 우리 측에서는 정원식 국무총리가 연형묵 정무원 총리와 마주 앉았다.

4차 회담에서는 앞선 세 차례의 회담과 달리 남북 간 합의가 도출됐다. 비로소 양 측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라는 명칭과 단일 문건이라는 형식, 남북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이 담긴 내용 등에 합의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이른바 민족대단결을 강조하고 유엔군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 대미 평화협정 체결 등을 주장하며 불씨를 남겼다. 더불어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와 밀입북자 석방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했다.

다만 남북기본합의서 내용 조정과 문안 정리를 위한 대표 접촉은 네 차례, 합의서 문안 교환은 다섯 차례 진행되며 큰 틀에서의 이상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이후 남북은 1991년 12월 10~13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5차 고위급회담을 열고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서명 △핵 문제 협의를 위한 대표 접촉 △6자 회담 개최 등에 합의했다.

사진은 1992년 2월 1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6차 고위급회담. 남북은 이를 통해 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한 비핵화공동선언 등을 발효했다. /통일부
사진은 1992년 2월 1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6차 고위급회담. 남북은 이를 통해 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한 비핵화공동선언 등을 발효했다. /통일부

이후 남북은 1992년 2월 1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6차 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 3개 합의서를 발효했다.

분과위는 남북정치분과위원회(1992년 3월 9일·평화의집), 남북군사분과위원회(1992년 3월 13일·통일각),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회(1992년 3월 19일·평화의집) 순으로 설치됐다.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했다. 이는 남북 유엔 동시 가입(1991년 9월 17일)에 따른 분단 고착화를 우려, 분단국 내부의 민족적 관계로 정의했다는 평가다.

이어 남북은 1992년 5월 7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7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 합의서 △남북교류·협력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 3개 합의서를 발효했다.

아울러 광복 47주년을 계기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에 대해 합의했지만,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의 송환 문제 등으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은 1992년 9월 17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제8차 고위급회담에선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발효했다. 이로써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모두 7개의 합의서가 채택·발효됐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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