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안전보장 ‘빅딜’과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이우탁의 인사이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 입력: 2025.08.20 00:00 / 수정: 2025.08.20 07:55
우크라, 30여년전 美 믿고 자발적 핵포기...러시아 침공후 ‘뒤늦은 후회
’트럼프-푸틴 협상안 먼저 조율, 젤렌스키 수용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18일 백악관 회담에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을 환영하고 있다./워싱턴=신화.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18일 백악관 회담에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을 환영하고 있다./워싱턴=신화.뉴시스

[더팩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우리는 (핵)무기를 나눠줬지만, 그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3년여 지속돼온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유럽 정상들이 미국 알래스카와 워싱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최근 행보를 보면서 필자는 작년 10월의 이 발언이 떠올랐다.

젤렌스키 발언에는 30여년 전 자발적으로 핵폐기를 선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뒤늦은 후회’가 담겨있다. 우크라이나는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하자 독립하면서 갑작스럽게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소련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던 핵무기를 철수하지 않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려 1240개의 전략 핵탄두와 176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44대의 전략 폭격기에다 2천개로 추정되는 전술 핵탄두까지 보유했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탈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적극 부응하려 했다. 미국도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보유할 경우 다른 유럽 국가들도 핵개발에 나설 가능성을 우려했다.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는 신생국 우크라이나 핵폐기를 돕기 위해 '넌-루가 프로그램'을 적용해 총 4억 6000만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는 미국과 안보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는 대가로 비핵화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일부 의회인사들과 군부는 핵을 포기할 경우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이미 미국으로 기운 우크라이나 정부는 경제재건과 안전보장을 담보받았다고 이를 무시했다. 1994년 1월에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말한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대통령이 서명한 각서의 내용은 우크라이나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조건으로 독립주권을 약속하고,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 국경선을 존중하는 한편 우크라이나가 핵공격을 받으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각서 이후 우크라이나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4회에 걸쳐 핵탄두 등을 모두 러시아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 양해각서는 휴지조각임이 곧 드러난다. 러시아가 2014년 군사요충지이자 부동항이 있는 크림반도를 빼앗기 위해 침공한 것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전보장은 물론이고 국경선을 존중해주겠다고 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다시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상황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핵무기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30여년 전 우크라이나에 핵무기 포기를 설득하고 부다페스트 각서를 서명하게 한 클린전 전 미국 대통령은 2023년 4월 한 인터뷰에서 "그들(우크라이나)이 핵무기 포기에 동의하도록 설득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낀다"면서 "우크라이나가 계속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가 이처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도 클린턴도 모두 ‘뒤늦은 후회’만 한 셈이다. 젤렌스키의 처지는 앞으로 더욱 초라해질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5일(이하 현지시간) 알래스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을 러시아가 점령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사한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것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당사국이자 최대피해국인 우크라이나가 일단 배제된 채였다. 트럼프는 푸틴과의 협상 결과를 토대로 18일 젤렌스키와 유럽 정상들과 만나 담판을 했다. 외신이 전하는 내용을 보면 조만간 트럼프와 푸틴, 그리고 젤렌스키 3자회담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는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만난 뒤 곧 푸틴과 직접 만나 러시아의 침공을 끝내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며, 영토문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미 미국측은 나토 조약 5조, 즉 회원국 중 한나라에 대한 공격은 나토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공동대응한다는 내용과 유사한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대신 우크라이나 일부 영토를 러시아에 내주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재의 전선을 동결하고 서방측 군대를 주둔시키는 이른바 ‘한국 모델’이 가능하다고 전망해 눈길을 끌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이긴 하지만 미군에 의해 남한이 보호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0여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정상이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내용이 최종적으로 어떤 것일지 불투명하지만 우크라이나로서는 어정쩡한 종전에 자국 영토를 양보하는 굴욕을 받아들여야하는 처지에 몰리게 됐다. 트럼프의 특기인 ‘거래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에 대해 분노하는 여론도 있지만 우크라이나로서는 마땅한 다른 대응책도 없는 실정이다.

이번 사례는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결국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부다페스트 각서’ 수백장이 있어도 공염불임을 말해주는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당연히 한반도 정세에도 반면교사로 투영되고 있다.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