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나울 폭(暴)에 불꽃 염(炎). 폭염이 이름값을 하고 있다. 비가 그치면 또 연일 폭염 주의보가 발효되고, 도심은 열돔에 갇힌 듯 숨이 막힌다. 펄펄 끓는 더위에 거리를 걷는 것조차 버거운 날씨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곳은 도시 아래 숨겨진 밀폐 공간이다. 어둡고 습한 맨홀 속,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단 법과 제도의 부재가 낳은 사회적 참사, 즉 인재(人災)다. <더팩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지상 아래, 지하 깊은 곳에 방치된 사각지대를 총 3편에 걸쳐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국회=이하린 기자] 여름철마다 되풀이되는 맨홀 질식 사고, 해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이 미국·일본 등 해외 산업 안전 선진국과 가장 큰 차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산안법 초안 제작 당시 일본의 기준을 차용했고, 이후 미국과 유럽의 기준도 일부 반영했지만 현장엔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모호하고 두루뭉술, 韓…밀폐공간 정의부터 개선해야
안전 선진국들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점은 바로 밀폐공간의 정의다. 현재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별표18은 '밀폐공간'을 △장기간 사용하지 않은 우물 등 내부 △빗물·하천 유수 또는 용수가 있거나 있었던 통·암거·맨홀 내부 등 18개의 장소로 유형을 구분하고 있다. 다만, 14호(밀폐공간에 해당하지 않지만, 산소결핍 등 재해 발생할 수 있는 장소)와 18호(근로자가 상주하지 않는 공간으로서 출입 제한된 장소 내부)의 경우 장소가 규정하는 개념의 정의 자체가 불명확하다는 의미다.
보다 상세한 지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구체적인 장소가 모호한 경우, 현장의 관리자나 근로 감독자들이 감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지난 2020년 발행한 '국내외 질식재해 예방규정 비교 및 개선방향에 대한 연구'보고서는 작업 허가가 필요한 밀폐공간(1~17호)과 그렇지 않은 일반 밀폐공간(18호)으로 구분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미 산업안전보건청(OSHA)는 법적으로 '작업 허가가 필요한 밀폐공간'과 '작업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밀폐공간'을 구분해 관리하고 있다. 또 관리 허가가 필요한 밀폐공간의 경우, 지켜야 할 항목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한국도 밀폐공간에 대한 지침을 명확히 해서 필요한 곳에 적절한 감시·감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독일처럼 장소가 아닌 '상황' 중심으로 정의 개념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치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7일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밀폐공간 질식 사고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며 "톨루엔과 같은 휘발성 유기화합물이나 비활성 가스로 인한 산소 결핍 사고 등 예외적인 사례를 현행법에선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법의 허점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美, '작업 허가제·자발적 보호 프로그램'…위반 시 억대 규모 벌금 부과
OSHA는 엄격한 규정으로 노동자의 안전을 보호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때 억대 규모의 막대한 벌금과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SHA는 1993년부터 '허가 필요 밀폐공간' 제도를 시행 중이다. 맨홀을 포함한 모든 밀폐공간은 허가 없이 작업할 수 없고, 작업 전 반드시 산소와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고 위험성을 평가해야 한다.
또 '자발적 보호 프로그램'(VPP)을 통해 엄격한 안전 기준을 충족한 우수 사업장을 선정해 정기 안전 검사 면제와 기술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 고발자 보호 프로그램을 통해 사업장 내 은닉 방지 효과도 끌어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23년에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미국의 규정을 일부 차용해 △밀폐공간 작업 시 위험성 평가 의무화 △사전 교육 강화 및 작업허가제도 전면 시행 △산업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 강화 등이 명시했지만, 현장 적용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정안태 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현 울산안전 대표이사)은 통화에서 "한국에서도 질식 사고 예방을 위해 작업허가제를 실질화해야 한다"면서 "작업 전 허가서에 작업자·감시인 명단, 가스 측정결과, 환기·비상계획이 반드시 기재되고 관리감독자 승인 후 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밀폐공간에서의 사망사고가 발생할 시 수억 원대 벌금을 부과하는 미국처럼 징벌적 벌금 제도를 도입해 법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日, 맨홀 작업 '특별관리작업' 분류…'3단계 안전망' 구축도
일본 후생노동성은 맨홀과 하수관로 작업을 '특별관리작업’으로 분류해 산업 안전 문화 정착을 위한 장치를 만들었다. 작업 전 '사전 환기 및 측정, 전담 감시, 비상대응장비 및 훈련'이라는 3단계 안전망을 통해 위험성을 점검하도록 의무화했다.
입구 감시자 배치도 의무다. 감시자는 작업 중 절대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송풍기로 10분 이상 강제 환기를 하고, 삼각대와 같은 인양 장비를 현장에 상시 설치하도록 했다. 현장 근로자들은 연 1회 이상 구조 훈련 및 모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한국은 '밀폐공간 작업 프로그램의 수립·시행'을 규정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619조에 따라 안전보건 교육 및 훈련을 해야 한다. 다만 대부분이 영세 하청업체이기 때문에 실제 법에 규정된 밀폐 공간 작업 환경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부 현장에선 교육 이수나 감시자 배치를 서류상으로만 처리하는 등 형식만 갖추는 사례도 빈번하다.
정 전 국장은 "산소·유해가스 측정이 작업 중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하고, 전담 감시인과 비상대응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맨홀 외부 감시인이 구조대와 즉시 연락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훈련 결과를 작업계획서나 허가서에 기록해 추후 관리함으로써 정기적인 비상구조훈련을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