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사각지대] 매해 되풀이되는 '맨홀 질식死'…왜 못막나 <상>
  • 이하린 기자
  • 입력: 2025.08.17 00:00 / 수정: 2025.08.17 19:10
40도 무더위, 산소 4.5%…'죽음의 작업장'된 맨홀
역대급 폭염·밀폐공간·법 공백에…올해만 6명 사망
어둡고 습한 맨홀 속,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매년 여름마다 반복되고 있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단 법과 제도의 부재가 낳은 사회적 참사, 즉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나온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서예원 기자
어둡고 습한 맨홀 속,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매년 여름마다 반복되고 있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단 법과 제도의 부재가 낳은 사회적 참사, 즉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나온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서예원 기자

사나울 폭(暴)에 불꽃 염(炎). 폭염이 이름값을 하고 있다. 비가 그치면 또 폭염 주의보가 발효되고, 도심은 열돔에 갇힌 듯 숨이 막힌다. 펄펄 끓는 더위에 거리를 걷는 것조차 버거운 날씨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곳은 도시 아래 숨겨진 밀폐 공간이다. 어둡고 습한 맨홀 속,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단 법과 제도의 부재가 낳은 사회적 참사, 즉 인재(人災)다. <더팩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지상 아래, 지하 깊은 곳에 방치된 사각지대를 총 3편에 걸쳐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이하린 기자] #1. 지난달 27일 낮 12시 39분께. 한낮 최고기온 40도에 가까운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서 상수도 누수 긴급 복구공사에 투입된 노동자 A(70)씨와 B(75)씨가 맨홀 안에 들어갔다가 질식으로 숨졌다. 당시 맨홀 내부는 산소 농도는 4.5% 미만으로 안전 기준치인 18%를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2. 이보다 불과 3주 앞선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 한 도로 맨홀에서 유독가스 노출로 일용직 노동자 C(52)씨가 작업 도중 쓰러졌다. 그를 구하기 위해 맨홀 내부로 들어갔던 오폐수 관로 조사·관리 업체 대표 D(48)씨는 중태에 빠졌다가 8일 만에 사망했다. C씨는 실종 상태였다가 사고 발생 하루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여름철 밀폐공간 질식 사고가 매년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의 무관심과 불법 하도급과 관리 소홀이 중첩되면서 발생한, 사실상 '예견된 참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폭염과 폭우, 또다시 폭염이 반복되던 지난 7월, 이달에만 전체 맨홀 질식 사고(6건)의 절반인 3건이 발생했고 그중 2건은 사망으로 이어졌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5~2024) 맨홀 질식 재해자의 치명률은 54.5%(66명 중 36명)다. 2명 중 1명은 맨홀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한 것이다. 밀폐공간 전체 치명률 42.3%(298명 중 126명)를 비교해 봐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밀폐공간 질식 사고의 주된 원인은 공간 내 산소 결핍이나 유해가스 중독이다. 특히 여름철 더운 날씨로 인해 맨홀 내부 기온이 올라가면, 유해가스 발생이 많아져 질식 사고 위험성이 더 커진다. 맨홀이나 오폐수 처리시설에서의 미생물 증식과 유기물 부패가 활발해지면서 황화수소와 같은 유해가스가 다량 발생한다는 것이다.

밀폐공간 질식 사고의 주된 원인은 공간 내 산소 결핍이나 유해가스 중독이다. 사진은 영등포구청 직원이 맨홀을 개방해 하수관 내부의 상태를 정밀 진단하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 /정소양 기자
밀폐공간 질식 사고의 주된 원인은 공간 내 산소 결핍이나 유해가스 중독이다. 사진은 영등포구청 직원이 맨홀을 개방해 하수관 내부의 상태를 정밀 진단하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 /정소양 기자

전문가들은 기온 상승으로 인해 유해가스가 증가할 뿐 아니라 맨홀 같은 밀폐공간에서 산소 결핍 현상까지 겹치면서 치명률이 더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황화수소는 일정 농도를 넘기면 후각 마비를 일으켜 감지조차 어렵다. 특히 밀폐 공간에서 황화수소가 다량 발생하게 되면 고농도에서 수 분 내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4일 <더팩트>에 "기온이 올라가면 산소가 부족해지는데, 이는 오랫동안 자동차를 땡볕에 놔둔 뒤 문을 열려고 할 때 열기가 확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라면서 "주로 여름철인 6월부터 9월까지 이러한 사고가 집중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백찬수 대구보건대 소방안전관리학과 교수도 "여름에 더위로 인해 화학반응이 더 일어나서 유해가스 농도가 더 짙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밀폐공간 질식 사고는 2차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크다. 외부에 있던 사람이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구조하려고 들어갔다가 추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같은날 <더팩트>에 "산소가 결핍되면 의식을 잃기 때문에 '작업 공간에서 나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기 전에 쓰러진다"며 "외부에 있던 사람이 별도 장비 없이 서둘러 구조에 나섰다가 2차 사고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여름철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밀폐공간의 질식 사고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고임에도, 이를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법의 사각지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더팩트 DB
전문가들은 여름철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밀폐공간의 질식 사고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고임에도, 이를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법의 '사각지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더팩트 DB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고임에도 이를 예방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법의 '사각지대'다. 현행법상 '밀폐공간'의 정의가 규정돼 있지만 그 범위가 매우 넓어 모호하고 이로 인해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이행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 교수는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상주하지 않은 공간으로서 출입이 제한돼 있으면 모두 밀폐공간이다. 관리해야 할 사업장이 많다보니 제대로 의무 이행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불법 재하도급, 작업장 내 안전관리 소홀, 작업 전 절차 미준수도 문제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발생한 서울 금천구 맨홀 질식 사고의 경우, 당시 가산동 작업은 맨홀내부에서의 작업 계획이 없어 산소 농도 측정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 6일 발생한 인천 계양구 병방동 사고에서는 계약 위반인 2단계 재하도급 이뤄졌고, 원도급사는 사건 당일 작업이 진행되는지조차 몰랐다고 전해졌다.

정 교수는 "맨홀 작업은 보통 도급을 통해 외부 업체에 맡기는데, 현행법에선 발주자와 도급인 등 작업 환경에서의 역할과 책임이 모호해 당사자가 예측하기 어렵다"면서 "충분한 검토와 연구를 거쳐 법 개정이 돼야 하는데 보여 주기 식으로 단기적인 미봉책만 제시하다 보니 실효성이 없다"고 꼬집었다.


underwater@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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