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시형 기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일대에서 경부선 철로를 따라 피난 중이던 민간인 수백 명이 이유도 모른 채 미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전선이 남하하던 7월 23일 낮 영동 지역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에 국도를 따라 후방으로 피난하던 주민 500~600명은 26일부터 미군의 유도에 따라 경부선 철로로 피난길을 바꿔 이동했다. 그러나 미군이 갑자기 철길 위에서 공중 폭격과 총격을 가했고, 이를 피해 급히 철길 아래 쌍굴로 피신한 주민들에게도 집중 사격이 이어졌다.
무차별 사격은 3박 4일동안 계속됐다. 피난민들 사이에 북한군이 위장 잠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미군의 명분 아래 굴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 주민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다리 밑에 숨어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나온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150명이지만, 행방불명자 13명·후유장애자 63명 등을 포함하면 희생자는 총 228명에 이른다. 이 중 20세 이하가 111명으로 피해자 대부분이 유아·청소년이었다.
당시 10세였던 피해 생존자 양해찬(85) 씨는 <더팩트>에 "왼쪽 다리에 여러 개의 파편이 박히고, 허벅지에는 총알이 스쳐 흉터가 남았다"며 "당시엔 피가 철철 흐르는 줄도 몰랐고 한참 뒤에야 고통이 밀려왔다"고 회상했다.
그날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양 씨의 누나는 파편으로 왼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어머니는 하복부에 깊이 박힌 파편들로 인해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양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년 전 몸 바깥으로 밀려 나온 파편 일부를 꺼냈는데, 당신이 직접 간직하겠다며 갖고 계시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고 전헀다.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노근리 사건은 1999년 미국 AP통신의 탐사보도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공론화됐다. 이에 한미 양국은 조사단을 구성해 1년 3개월간 그날의 진실을 파헤쳤지만 2001년 공식적으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결론을 냈다. 미국은 학살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인 살상이 아닌 전쟁에 내재된 불행한 비극'으로 규정했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같은 해 "한국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냈다.
2004년에는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희생자 지원을 위한 법적 기반이 처음 마련됐다. 그러나 '희생자 또는 유족에게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규정만 있을 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보상 조항은 없어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
이후 2008년부터 13년간 특별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다섯 건이 임기 만료로 폐기되면서 국회의 입법 논의는 긴 시간 표류했다.
그 사이 유족 17명은 2015년 정부를 상대로 2억 55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하며 유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들은 미군의 행위로 인한 국민 피해에 대해 정부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 주한미군민사법을 유추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해당 법은 노근리 사건 이후에 제정돼 소급 적용이 불가능했다.
법적·제도적 공백이 지속되던 가운데 2021년 국회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명시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신체적·정신적 피해 치유 및 권익 보호, 공동체 회복 지원 등을 담은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통과시켰다. 그러나 구체적인 피해 보상 규정은 여전히 포함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배·보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한 전해철 전 행안부 장관은 제주 4·3 사건의 피해 보상 연구용역 결과를 참고해 노근리 사건 보상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듬해부터 4·3 사건 피해 보상이 본격화되면서 노근리 사건 보상 논의에도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됐으나, 4·3 사건 세부 용역 결과 발표 이후에도 현재까지 공식적인 피해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8월 실질적 보상 규정을 포함한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이 역시 1년째 계류 중인 상태다.
유족들은 국회가 특별법 추진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더팩트>에 "사건 발생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보상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며 "법안 계류에 대한 책임은 여야 모두에게 있지만 특히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현재 행안위 법안소위에 회부만 되어 있는 상황"이라며 "계엄 정국과 대선 등 영향으로 상반기 내내 소위가 거의 열리지 못해 법안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 정부에서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는데 정권이 교체된 만큼 이번에는 심사에 속도를 내 본격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미국이 개입된 사건이라는 특수성은 유족들의 목소리를 외교적 부담 속에 갇히게 했다. 진상규명 요구조차 반미 정서로 치부하는 시선 속에서, 이 사건은 오랜 기간 금기이자 때로는 성역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국내 언론이 아닌 미국 언론이 사건을 세계적으로 공론화시켰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자국의 아픈 역사에 얼마나 성실히 응답해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에 대통령 차원에서 공식 사과와 함께 진상규명을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은 미국만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전쟁이든 평시든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기본 책무인 만큼 국가 수반이 직접 나서 피해자와 유족에게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대선 공약집에서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약속한 만큼, 역대 정부에서 매듭짓지 못했던 진상규명이 이번에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참혹한 비극의 기억을 넘어, 이를 미래 세대 교육의 기회로 삼고 한미 관계의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는 "전쟁 중 비무장 민간인이 희생되는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그늘진 역사까지도 정확히 가르쳐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미국 초·중·고 역사 교육과정에 노근리 사건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미군 희생자 유해 발굴도 인도적 차원에서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영동 일대에서 벌어진 세 차례 전투로 희생된 미군 33명의 유해가 아직 이곳에 잠들어 있다"며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유족회는 최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방문해 영동 지역 미군 유해 발굴을 공식 요청했으며, 미국으로의 송환을 촉구하는 공문도 전달했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은 양국 미래를 잇는 국제적 사안"이라며 "이 문제를 성실히 해결해 한미 관계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근리 사건은 단순한 과거사의 한 장면이 아니다. 비극의 현장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상징적 공간이 되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깊은 성찰도 요구한다.
노근리는 '아픔의 공평함'도 묻는다. 현재 남아있는 피해 생존자는 20여 명에 불과하다. 75년간 지연된 정의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 국회는 이에 책임있게 응답할 의무가 있다. 양해찬 씨는 "누가 뭐라 해도 노근리 사건은 우리 정부가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개정안 통과와 함께 75년간 잠들어 있던 배·보상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