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북미 양국이 대화 재개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미국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내비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를 위한 북한과의 대화는 열려있다고 밝혔다.
다만 북미 간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현재로선 한국이 소외될 공산이 적지 않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밝히기 직전, 한국과는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겠다며 '적대적 두 국가 기조'를 분명히 해서다. 문제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만한 수단을 조기에 소진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28일 김 부부장은 북한 대외매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그 능력에 있어서 또한 지정학적 환경도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인정"이 전제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지금은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됐던 2018~2019년과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북미 회담의 주요 의제는 비핵화였지만 이제는 핵보유국 지위 자체를 인정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 북미 양국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을 통한 공동선언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에서는 비핵화 조치에 따른 입장차로 합의문 도출에 실패했다. 이후 북한은 그해 12월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핵무력을 강화하는 '정면돌파전'을 선포했다.
김 부부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사적 관계가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 관계가 비핵화 실현 목적과 한 선상에 놓이게 된다면 그것은 대방에 대한 우롱으로밖에 달리 해석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북미 대화의 전제는 핵보유국 인정과 협상 테이블에 비핵화를 철저히 제외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김 부부장의 이같은 담화 직후 미국 백악관은 28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김 위원장과 대화를 재개하는 데 열려있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백악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종식을 위해 김 위원장과의 대화에 여전히 열려있다"고 했다.

북미 양국이 대화 전제로 언급한 핵보유국 인정과 비핵화는 충돌되는 사안이지만 '대화' 자체에는 공감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단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의제들부터 설정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 직무대행은 "미국은 시작부터 비핵화가 아니라 북미 관계 개선이나 긴장 완화 문제를 주제로 북한에 만나자고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며 "현실적으로 완전한 비핵화를 곧바로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실현 가능한 목표를 우선적으로 설정하고 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북미 대화 재개를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통일부는 당국자는 이날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안정을 위해 북미회담 재개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당국자는 "한미 양국은 한반도 평화 및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북한과 열려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혔다"며 "앞으로 평화 분위기 안에서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북미회담 재개를 촉진하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한국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북미 대화가 시작되더라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이미 북한은 2023년 12월 말부터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더군다나 북한은 이번 담화 직전 김 부부장을 통해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며 이같은 기조를 명확히 했다. 한국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해석이다.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만한 수단도 조기에 고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의 대북 조치는 북한이 정말 원하는 것을 다 해준 게 맞다"며 "문제는 지금부터 북한이 원하는 걸 해줄 수가 없고, 해줄 게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북한으로서는 받을 건 다 받은 상황에서 (적대적 두 국가 규정 담화로) 치고 나간 것"이라고 했다.
북미 협상에서 한국이 소외된 최악의 경우, 핵 군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이미 김 부부장은 이날 담화를 통해 "핵을 보유한 두 국가가 대결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결코 서로에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최소한의 판단력은 있어야 할 것"이라며 "그러한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출로를 모색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