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서울대 명예교수, 수의학자, 시민정치 운동가, 불교신자.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우희종은 정년퇴임 이후에도 광장 밖에서 조용히 시대를 응시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자택에 마련된 고요한 다도 공간에서 그는 차를 따른다. 커피보다 자극이 덜하고, 시간의 여백이 깃든 차를 더 좋아한다. 학문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든 그는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가치로 '권위가 아닌 공익'을 꼽았다. <더팩트>는 6·3 대통령 선거를 6일 앞둔 28일 최요한 정치평론가와 함께 우 명예교수를 만나 한국 정치의 현실을 진단했다.
우 명예교수는 한때 미국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귀국 후 간화선을 통해 불교에 입문했다.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오랜 다도 습관과 불교적 사유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 차를 우리는 행위 속에는 '비움'과 '성찰'의 의미가 배어 있었다.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 도쿄대에서 생명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와 하버드대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갔다. 이후 1992년 서울대 교수를 부임해 2023년까지 30년 넘게 교육과 연구에 헌신했다. 교육자였지만 동시에 시민정당인 '시민을 위하여'를 창당해 현실 정치에 목소리를 낸 행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감'이라는 단어로 정년퇴직을 정의한다. 2년 전 학교를 떠나던 순간, 사회적 책무를 다해왔다는 마음과 함께 비로소 사적인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즐거움이 밀려왔다고 했다. 정년은 자신에게 있어 "공과 사를 대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제는 내 삶, 내 시간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차를 따르는 얼굴에는 오래 기다려온 자유와 평온이 스며 있었고, 차의 온기처럼 조용하고 단단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정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예리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선포된 계엄 상황은 그에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박정희·전두환의 시절을 지나온 그에게 '계엄'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 현실은 40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당혹이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며 민주화운동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접했던 그는, 그때부터 느껴온 부채감이 이후 사회운동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1981년도에 외국에 나갔는데, 광주의 사진과 비디오가 이미 다 퍼져 있었어요. 저는 그 뒤에도 공부한다고 외국에서 편하게 지냈는데, 1987년 민주화까지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죽어가며 민주화를 이룬 걸 보면서 큰 빚을 진 기분이었죠."

효순·미선 추모에서 시작됐던 촛불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의 '응원봉' 물결로 이어졌다. 그는 그 흐름에서 시민이 바꾼 정치의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말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의 촛불이 일종의 '이기적 동기'였다면, 이번 응원봉은 '이타적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즉, '촛불의 진화'로 평가한다.
"응원봉은 정말 놀랐어요. 젊은 친구들, 특히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사회의 변화를 느낀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근혜 퇴진 당시의 촛불은 특혜에 대한 분노였잖아요. '우리 딸이 갈 수 있는 걸 뺏겼다'고 생각해서 내면의 기득권이 침해됐을 때 일어나는 분노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사적인 것과 상관 없이 과거 경험이 누적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21세기에 걸맞게 움직인 거죠."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우 명예교수의 평가는 신랄했다. 윤석열 정권을 '갑툭튀 정권'으로 명명한 그는 검사 출신이라는 배경이 즉흥적인 국정 운영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그때그때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긍정적 의미로든, 부정적 의미로든 아무런 역사적 맥락이나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12·3 사태를 통해 드러난 서울대와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한 해체론을 넘어선 근본적 개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와 육사가 철저하게 엘리트 문화에 기여하는 구조로 자리 잡고 있어요. 엘리트 양성소로 전락한 것 같아요. 저는 엘리트 문화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구조를 변화시켜야 해요."
그는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를 그러한 엘리트주의의 집약체로 봤다. 지난 27일 열린 TV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여성 신체 부위와 젓가락을 언급해 논란이 된 점을 언급하며 "정말 그런 말이 토론회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며 "엘리트주의식 교육과 개인의 우월의식에서 그런 말을 던진거라고 본다. 욕망으로 싸우더라도 지켜야하는 공공선이라는 걸 놓친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도 우 명예교수는 정치에 만연한 극단성이 특정 인물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그는 "우리 사회는 다양한 종교도 품는데, 정치에 있어서는 극렬하다. 양당정치가 만들어낸 구태 때문"이라며 "상대방 공격만 하면 되니까 분열·갈등 조장이 내면화돼 사회 분열을 심화시킨다"고 말했다.
이어 "진보정당이건 보수정당이건 그들이 심어놓은 증오와 혐오를 우리 스스로가 내면화했기 때문"이라며 "이걸 극복하지 않는 한 정치꾼들에 의해 우리는 계속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곧 출범할 새 정부에는 문재인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구체적 조언을 제시했다.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굴러온 돌"이라 표현하며, 민주당 내부의 기득권과 마찰이 있었음에도 여기까지 온 점을 높이 평가했다. 우 명예교수는 "국민들이 이재명한테 기대하는 것도 그런 지점"이라며 "진보·보수를 아우르되 과감하게 개혁은 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무엇보다도 인사 쇄신을 첫 과제로 꼽는다. 우 명예교수는 "적폐 기득권들이 해방 이후 쌓아놨던 인사들을 뽑아내는 것부터 시작"이라며 "두려워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권 당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의 실행력을 반면교사 삼을 필요도 있다고 조언한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도 탁탁 풀었지 않나. 하면 되는 거니까"라며 "민주당은 눈치를 보고 못했던 거였다. 이번에는 눈치 보지 말고 해야 된다"고 했다.
시민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혁신적 구상을 제안했다. 개헌에서도 시민들의 참여를 강조했다. 우 명예교수는 "구태 정당 형태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열린 정당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형태의 시민의회를 법제화해서 시민들이 휴대폰으로도 정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헌법학자나 사법계는 이미 이 시대의 기득권"이라며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지 말고 개헌 과정에도 시민들을 참여시켜서 열린 체제로 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현재 우 명예교수는 대부분의 활동을 정리하고 남북문제와 동물권이라는 오래된 관심사에만 집중하려 한다. 차를 우리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치열했던 공적 삶에서 이제 자신만의 시간으로 돌아온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한 시대를 지나온 자의 목소리는 차 한 잔의 여유 속에서 더 깊은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