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김세정 기자]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안한 대선·개헌 동시투표 제안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실상 반대로 동력을 잃었다. 이 대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권력구조개편을 기반으로 한 개헌에 선을 그었고, 친명계들도 잇따라 부정적 입장을 내놨다. 비명계 잠룡들을 제외하면 개헌론은 당내에서 빠르게 힘을 잃은 모양새다. 지도부 차원의 정리가 이뤄지면서 우 의장의 제안은 큰 반향 없이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7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이 대표는 개헌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지금 당장은 민주주의 파괴를 막는 것이 훨씬 더 긴급하고 중요하다"며 "우선은 내란 종식 집중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국민투표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이게 또 시한이 있다"며 "이번 주 안에 처리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60일 안에 대선과 동시에 개헌을 한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다.
차기 대선 후보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선출 이후 신속히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도 전했다. 다만 이 대표는 국민투표법 개정을 전제로 계엄 요건 강화와 5·18 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에 한정해 개헌을 추진하는 것에는 여지를 남겼다.
우 의장의 발언이 "가장 어려운 권력구조 개편은 이번 기회에 꼭 하자는 것", "지금 국민의 열망은 극한 정치갈등의 원인인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독식 정치구조를 바꾸라는 것"에 방점이 찍혔던 점을 미뤄보면 사실상 이 대표가 우 의장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개헌을 통해 헌정질서 복원은 물론 정치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우 의장의 구상은 민주당 내 주류의 '시기상조' 판단에 가로막혔다. 김병주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 개헌에 대한 논의는 시기상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개헌 논의는 실질적으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 사안"이라며 "시기도 부적절하고 기간도 60일 정도면은 대단히 부족하고 졸속으로 진행될 수가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반면 비명계는 개헌론에 긍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우 의장의 대선-개헌 동시투표 제안에 적극 동의한다"며 "이번 조기대선은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가늠하는 선거이며, 개헌은 그 관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도 "내란 수습을 핑계로 개헌을 방관하는 태도는 안일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비명계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당의 전반적 흐름은 개헌과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한 초선 의원은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지금은 내란 잔불 정리의 시간이지 개헌 얘기를 꺼낼 때는 아니다"라며 "국민의힘은 여전히 헌법을 부정한 세력과 단절을 못 하고, 내란 우두머리가 1호 당원이지 않나. 이런 세력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상황이 아닌데 무슨 헌법을 개정한다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한 중진 의원도 "파면된 윤석열의 승복, 그리고 형사절차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계엄 사태에서 윤 대통령에 대해) 일정 부분 동조했던 국민의힘의 대국민 사과, 새출발에 대한 약속들이 전제돼야 개헌 논의가 가능한데 그런 것이 있지 않았다"라고 잘라 말했다.
한 재선 의원은 "법안을 하나 마련해서 준비하는데도 한 달씩 걸린다"라며 "주권자들의 의사가 (개헌안에) 담겨야 하는데 국민에게 설명하고 납득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하지 정치권이 뚝딱 만들어서 제안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지 않나"라고 물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번 사안을 두고 차기 대선에 앞서 이 대표가 당내 구심력을 확실히 다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개헌이라는 정치적 변수를 빠르게 걷어내고, 내란 수습과 대선 준비라는 전략 기조로 전환한 셈이다. 일부 상징적 개헌에 여지를 남긴 것은 정치적 유연성으로 읽히지만, 정국 주도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통화에서 "지금 대선 정국이어서 빨리 정국을 바꿔야 할 상황인데 개헌을 얘기하면 모든 이슈는 거기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며 "개헌에 대한 우 의장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진정성만으로 승부를 보는 건 정치의 세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다만 개헌 논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대표가 언급한 일부 조항은 향후 국회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우 의장은 이 대표의 입장 발표 후 "개헌은 제 정당 간 합의하는 만큼 하면 된다"며 "이번 대선에서부터 개헌이 시작될 수 있도록, 국민투표법 개정부터 서두르자"고 밝혔다. 하지만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본격적인 개헌은 이 대표가 밝힌 대로 차기 대선 이후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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